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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움직이는섬 Apr 13. 2017

김훈, 『공터에서』

얽매인 삶의 무게

첫 문장


마동수는 1979년 12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산외동 산 18번지에서 죽었다.


지극히 건조하고 담담한 죽음에 대한 묘사.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인가. 나는 모른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자인 카뮈가 쓴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이 세상에 연고 없이 내던져진 존재처럼 묘사된다. 그에게는 기존의 윤리, 관습, 법, 문화, 역사가 모두 무의미하거나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세상과 철저히 단절되어있고, 그렇기에 뫼르소는 그가 속한 세계의 타자, 누구도 접할 수 없어 보이는 절대적 타자처럼 보인다. 『이방인』의 첫 문장은 아주 강렬하게 그 사실을 알린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결속을 상징하는 엄마의 죽음도 그에게는 낯선 타자의 일이다.  


김훈의 『공터에서』를 읽으며 카뮈의 소설을 떠올린 것은, 단순히 우연은 아니다. 김훈의 문체는 아마도 실존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느낌의 유사성은 단지 문체 때문은 아니다. 그런 느낌은 오히려 이 소설의 이야기가, 아이러니하게도 카뮈와는 반대의 방식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 그리고 이방인이 ‘되길 원하는’ 인간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뮈가 세상과 철저히 단절된 이방인으로 뫼르소를 그렸던 것과는 달리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낯선 타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히 이 세상 ‘곁에서’ 살아가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받는다. 세상에 내던져진 채, 처절한―그러나 정적인―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낯선 타자가 될 수 없는 인간이 문제이다.



소설은 마씨 집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아버지인 마동수, 장남 마장세, 차남 마차세이다. 소설은 현대사의 격동기인 20세기를 배경으로 이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동수는 일제의 탄압으로 삶의 터전을 떠나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고, 해방 이후에는 한국 전쟁을 몸소 겪는 등 시대에 떠밀려 젊은 시절을 보낸 인물이다. 장남인 마장세는 군부 독재 시절을 경험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군 시절을 보낸 인물인가 하면, 차남 마차세 역시 격동기에 내던져져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만약 역사적 배경에 중심을 둔다면, 이 소설은 근현대 격동기를 살아가는 마씨 집안의 애환을 다룬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적 배경은 중요하다. 소설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특수한 사건을 통해 독자를 그곳으로 초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진위여부를 따지거나 고증하는 것은 이 소설의 목적도, 또는 소설 자체가 지향하는 방향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혼란했던 그 시기는 마씨 일가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끊어낼 수 없었던 그들의 실존적 상황을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처럼 보인다. 누구도 자신이 던져진 세계에서 이방인으로 살 수 없다는 그 실존적 상황을 말이다. 김훈은 그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육체’로, ‘혈연’으로, ‘가족’으로 묘사한다.


삶의 내용은 모두 다르지만, 마씨 삼부자는 그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버지인 마동수는 자신의 시대적 상황인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의 상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이런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도망갈 수도,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저 상황에 자신을 맡기며 살아가다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마동수의 죽음은 이렇게 묘사된다. “마동수는 1910년 경술생(庚戌生) 개띠로, 서울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내고, 만주의 길림, 장춘, 상해를 떠돌았고 해방 후에 서울로 돌아와서 6·25 전쟁과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를 살고, 69세로 죽었다. 마동수가 죽던 해에,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중략) 마동수의 죽음과 박정희의 죽음은 ‘죽었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 관련이 없다.” 여기에 마지막 한 문장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아무 관련이 없지만, 그는 그런 시대를 살았다’라고.  


장남인 마장세에게 가족으로서의 책무는 일이 있을 때마다 가끔씩 동생에게 약간을 돈을 부쳐주는 것뿐이다. 그는 자신을 옭아매는 혈연과 비루했던 어린 시절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동료를 죽인 월남전 파병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족과 조국을 떠나 과거의 기억과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길 원한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우연한 사건을 통해 빈번히 역경에 부딪힌다. 베트남 전쟁에서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분대원의 형과 엮이거나 동생의 친구와 사업을 함께하는 등의 우연한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혈연과 과거의 흔적은 그를 자유롭게 놔주지 않는다.


막내인 마차세는 두 사람과 조금 다르다. 그는 병든 아버지를 간호하는 유일한 인물이고, 비록 임종에 가까워진 아버지를 외면하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홀로 책임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마장세가 벗어나고자 했던 혈연으로부터, 그리고 마동수가 벗어나고자 했던 시대로부터 달아나지 못하고, 자신을 옭아매는 상황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자신과 다른 삶을 선택한 형과 아버지에게 작은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마차세의 모습은 마치 그의 엄마인 이도순과 같다. 비루하게 벗어나려고만 하는 자신의 남편과 장남에게 작은 분노를 느끼지만, 그들을 떠날 수 없어 그저 견뎌냈던 인간. 이런 의미에서 이도순 역시 그녀를 옭아매는 혈연과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수동적 인간처럼 보인다.  


이처럼 소설은 자신의 세계에 얽매인 인간들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자유롭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많은 것에 묶여있다. 그것이 윤리, 관습, 법, 문화일 수도 있고, 연이나 가족, 타인, 시대나 역사일 수도 있다. 이런 조건들은 때로 이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매개일 수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에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마씨 일가의 경우처럼 이는 견딜 수 없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애석하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없다. 그저 세상에 내던져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단순하다. 우리는 그저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마씨 삼부자가 그러했듯이 어떤 선택을 하던지 그저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추하거나 비루해 보이더라도, 때로는 벗어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폭력적 상황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를 얽매는 모든 상황으로 인해 길을 잃더라고,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아버지 마동수의 죽음 이후 어머니 이도순은 8년의 삶을 이어간다. 그녀는 그 8년 중 7년을  요양원에서 보낸 후 죽음을 맞이한다. 마동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차세는 요양원에 던져진 이도순의 삶을 책임지며 살아가고, 그녀의 죽음 역시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홀로 어머니의 죽음을 짊어지는 마차세에게 그의 부인인 상희는 말한다.

 

슬프지만 나쁜 일은 아닐 거야. 우선 국을 마셔.


아마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혹은 나쁜 일이 아니기를 바랄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 얽매여 살아간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시 그것이 나쁜 일이 아니기를 바라며 각자의 삶을, 그리고 서로의 삶을 애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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