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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n Apr 12. 2019

연애와 고양이 - INTRO

 싱글은 왜 연애 대신 고양이를 고민하게 되었나 


어느 대학 동기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는 싱글이었다.

집 안에서는 아니고, 집 밖 복도에서 한강이 보이는 오래된 아파트였다.

역시 금융맨이라 재테크가 남다르다며, 혹은 이게 뭔 돼지 발에 워커냐며,

이런저런 말들을 섞으며 그의 집들이에 방문했다.




성인이 된 후 방문하는 친구의 집이란 보통 좁아터진 원룸, 하숙집, 고시원이기 마련이었는데, 직장인이 되긴 했었나보다. 남이 살고 있는 '아파트'라는 곳에 들어선 것은 유년 시절 이후 거의 첫 기억이었다. 아파트라 하면 의례히 소파와 TV, 침구를 기본으로 하여 가족 각각을 조금씩 드러내는 오브제가 있기 마련이었는데(아이의 장난감, 한 사람의 취향이라 할 수 없는 주전부리들, 따위의), 그 친구의 집에는 오로지 그의 책상과 의자, 침대, 그리고 감히 예상컨데 훗날 크고 튼튼한 옷걸이로 전락할 운동 기구뿐이었다.


그 날, 호스트를 포함한 일곱 명의 남자가 모였다. 8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대학 동기들. 그중 한 명만이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기혼자가 가능한 날 무조건 모이자'는 암묵적인 합의를 이루어 내었다. 일기예보상 날씨도 너무나 쾌청할 어느 금요일로 집들이가 정해졌을 때,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그 기혼자 한 명을 빼고는 죄다 싱글이었으니까.




10년이 조금 지난 어느 옛날,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음악 동아리에서 만나 가끔은 쥐가 나오던 지하 연습실을 공유했던 우리의 대화 주제는,

돌이켜 보건대 단순했다.

음악 3, 여자 7.


음악은 그 어느 것에도 열정 없던 귀차니스트를 손에 피가 나도록 밤새 연습하게 했고,

여자는 평생 술은 입에도 대지 않던 대쪽 같은 대학생에게 소주 네 병을 마시게 했다.


서로의 연습을 돕고 응원하던 우리는 (동아리라는) 공동체의 훌륭한 동료이자 구성원이었고,

다음 날 수업을 포기하며 누군가와의 첫 술을 마셔준 우리는

참으로 강렬하나 굳이 입 밖에 꺼내기는 부끄러운 추억들을 공유한 친구이자 전우였다.

(물론 이래 놓고 온 동네 소문은 다 내고 다닌다. "야, 누가 어제 차여서 술 마셨다!!!!")




그날의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며 오랜만의 시간을 보냈을까를 애써 떠올려 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음악과 이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아젠다의 전부였던 대상들은 그저 중간중간 대화가 끊겨갈 무렵의 '촉매' 역할에만 충실했었다는 것이다. 30대 초반이니, 중반이니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것이 구차한 그런 나이가 되어버린 우리의 대화 패턴은 돌이켜보건대 이러했다. '재테크' 이야기가 나오면 이번에 아파트를 장만한 호스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전세로 아파트를 구한 이유와 과정 그리고 향후 계획을 브리핑받은 후, 각각의 의견을 더한다. 재테크 이야기가 재미없어질 무렵, 누군가 그 호스트의 (음악 혹은 연애에 대한) 10년 전 흑역사를 들춰낸다. 모두가 웃는다. 그러는 동안 다른 아젠다가 제기되고(예컨대 '건강'), 그에 대한 오피니언 리더가 등장하며, 건강에 대한 열띈 토론을 펼친다. 그리고 그 오피니언 리더의 (음악 혹은 짝사랑에 대한) 흑역사를 들춰낸다.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대화의 주제가 '결혼'이 되었고 오피니언 리더는 자연스레 유일한 기혼남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화는, - 그 기혼남의 흑역사를 신나게 들춰낸 후 - 아주 자연스럽게도 '우리(나머지)는 왜 싱글인가'로 전환되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왜 대체로 '몰개성'과 동의어로 쓰이는 걸까. 그러지 않는 멋진(?) 사람들이 TV며 SNS며 유튜브에 넘치는 것을 보며 느껴야 하는 것은 패배감일까, 아니면 여기 나와 똑같은 이들과의 동질감일까. 연애에 대한 우리의 열정, 조예, 지식, 지혜는, 놀랍도록 흘러간 시간만큼 하향 평준화되어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수준이 떨어진, 끝도 없이 오가는 우리의 연애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그 누구도 '내가 연애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근의 연애가 좀 오래된 누군가에 대한 질의와, 연인과 갓 헤어진 누군가에 대한 훈계와, 각각의 과거에 대한 추억(?) 소환 등이 활발히 오가는 와중에, 10년 전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또 너무나 당연했던 '전제'가 빠져 있었다.


"나 연애하고 싶다"


그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신기했다. 물어보기 시작했다. 한강이 보이는 전세 아파트를 구한 것은 미래의 연애와 결혼을 위한 포석이 아닐까 하는 일차원적인 생각에, 호스트에게 물었다. 넓은 집도 구했는데 연애할 생각 없냐며, 여기 신혼집 되는 거 아니냐며.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 그리고 친구들의, 심지어 나의 덤덤하고 당연하단듯한 반응이, 그 순간 자연스러우면서도 참 이상했다. 그게 왜 자연스러웠던 걸까.


"글쎄, 집도 적적한데 고양이나 키울까 싶네."


그 날 오간 어떠한 이야기들보다 많은 공감과 끄덕임이 오갔던 말로 기억한다.




그 모임을 떠나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싱글인가. 상대방에게 보일 모습이 썩 매력적이지 않아서도 물론 있겠으나, 나의 이 의지 없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가끔 외로움을 느낄 때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랑에 빠지고 싶다'라고 노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이유'로 책은 한 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왜 그 순간 '고양이'가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들렸을까.



흔히 말하는 내 연애세포는 어디로 갔을까,

고양이는 정말 나 같은 사람도 키울만할까,

연애도 모르고, 고양이는 더더욱 모르지만,

앞으로 감히 고민하며 흔적을 남겨보려 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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