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에서 돌아오며 여행을 생각하기
얼마 전 부산에 당일치기 출장을 다녀왔다. 기차로 떠나 비행기로 돌아왔다. 너무나 힘들거나 큰 난관이 있지는 않았지만 이래저래 번거로워서 빨리 해치우고 싶은, 그런 번잡한 출장이었다. 출장지에서 만난 동료는 부산에 와서 회 한 접시 못 먹고 바다 한 번 못 보고 가는 것을 한탄했고 마음으로 함께하며 위로도 해줬지만, 딱히 그 마음에 동화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빨리 끝나고 서울로, 집으로 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어린 시절을 부산에서 보낸지라 딱히 회나 바다 귀한 줄 모르고 자란 시간이 길어서일 수도 있을 것이고, 한동안 당연하게도 여행이라는 것이 없어졌던 세상 덕분에 길거나 먼 여행을 떠나본 지 오래라 집에 대한 애착이 더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런 식으로 세상이 변해버렸던 시절 데려온 고양이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물론 가끔씩은, 떠나고 싶은 마음에 고양이에게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어쩌다 잠시 오래 떠났다 돌아와도 용서해 주렴"이라 세뇌를 걸어보곤 한다).
번거로웠던 출장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서둘러 서울로 돌아오는 교통편의 시간을 확인했다.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워낙 컸던 탓에 일정이 마치는 즉시 떠날 수 있는 가장 빠른 티켓을 사고자 미리 예매도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남아 있는 KTX 차편의 시간이 애매하다 보니 비행기가 집에 더 빠르게 갈 수 있기에 비행기를 골랐다. 부산의 출장지에서나 서울의 집에서나 기차역이 훨씬 가까웠고 그렇기에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로는 몇십 분 차이가 나지 않기는 했지만, 1초라도 빠르다면 비행기를 탈 참이었다.
생각보다 여유롭게 김해공항에 도착하여 나를 집에 데려다줄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문득 여행을 마칠 때 공항에 도착한 기분이 생각났다. 여행만 떠나면 마냥 신났던 어렸을 적에는 여행지가 어디였든 상관없이 집에 가는 것이 아쉬워 울어재꼈던 기억이 난다. 나이가 들고 조금씩 집의 소중함도 알게 되고, 무엇보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스스로의 책임 하에 이루어지는 여행을 하게 된 이후에는 아쉬움과 함께 찾아오는 안도감도 분명 있어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평생에 경험하는 공항 중 언제나 가장 아쉽고 슬픈 공항은 아마도 여행이 끝남이 일깨워지는 공항이리라. 아직 세상을 경험한 시간이 짧아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 아무리 일로 떠나는 출장일지라도 낯선 곳으로의 떠남 자체는 아직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어서 그럴지 모른다.
어쨌거나 고된(?)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던 그날의 공항은 마치 여행을 떠날 때의 기쁨 같은 설레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돌이켜보건대 새삼 느낀 지 오래된 것도 같은 그 기분을 실제로 느낄 수 있게 되기 전 그렇게 체험을 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지 3년 차가 되었을 때, 매우 싼 가격에 올라온 5개월 후의 파리행 왕복 비행기를 충동적으로 예약해 버린 적이 있다. 다른 대륙으로 열흘 가까이 떠나는 여행을 오로지 나의 돈으로만 떠나기로 결정한, 내 나름대로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막상 예매를 하고 돌이켜보니 감사하게도 파리는 살면서 두어 번 이미 다녀올 수 있는 경험이 있었기에 파리에만 머물다 오는 것보다는 다른 도시를 위주로 여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파리행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리스본으로 떠날 수 있게 추가 예약을 해두었더랬다.
서울에서 파리로 떠나는 항공편은 코드셰어가 되지 않는 경유 편이었고, 따라서 북경에 도착하면 12시간 동안 짐을 꺼낸 채 공항을 떠났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야 했다. 심지어 거기에 더해 파리에서 리스본에 가는 항공편도 따로 예매했으니, 파리에서도 당연히 짐을 꺼낸 채 6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리스본까지 36시간이 걸리는 여정을 스스로 완성해 버렸고, 그것이 주는 육체적인 피로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날에 인천공항으로 떠나던, 그 기념비적인 여행을 기뻐하고 설레어하던 그 마음은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마음에 순풍을 쐬어주는 기억이다. 그 기억이 그렇게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에, 나의 리스본-파리 여행이 손꼽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음도 당연히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큰 기대를 안고 갔건만 별로였던 여행도 물론 있다. 익숙한 풍경과 비슷한 억양의 소음이 더해져 마치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 한참을 시달린 후 하교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던 오사카 여행도 있었고, 상상 이상의 인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는 심지어 두어 시간 만에 떠날 결심을 해버린 항저우 여행도 있었다. 이와 달리 여행지가 아무리 좋은 곳이었다고 한들, 그 좋은 여행지를 느끼기보다는 정당성 없는 의무감에만 사로잡혀 정신없이 보내야 했던 가족 여행도 이따금 있었다.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시간과 비용이 들었던 여행이 막상 경험했을 때 기대만큼 좋지 않았고 만약에 그래서 그 여행지에서의 좋은 기억도 부정하고 싶어 진다고 한들, 그 모든 일이 있기 전까지 느꼈던 공항에서의 설렘만큼은 그 모습 그대로 남겨둘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끔은 희화화의 소재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가 하면 이미 여행지에 당도하기 전부터 기대감 없이 고역으로 느껴지는 여행도 있다.
의무감에 사로잡히는 가족 여행이 반복되다 보면 출장 이상의 부담과 좌절을 느끼기 마련일 것이고, 동행의 문제나 일정의 문제, 혹은 여행지 자체의 문제로 썩 기대가 되지 않는 여행도 분명 있을 수 있다. 한참 전 둘도 없는 친구들과 짠 계획이건만 막상 여행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누군가와 서먹해져 있을 수도 있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정한 여행지가 내 마음에든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여유가 허락되지 않을 때 어찌 되었든 떠나야 하는 여행일 수도 있고, 오랜 결핍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한 장소와 일정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주위의 이해도 얻기 힘들 것이다. 보편적으로 좋은 일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 결핍을 호소할 때, 그의 결핍보다는 보편적인 긍정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재단하는 사람이 주위에는 생각보다 많다. 무슨 말을 하든, '다 필요 없고 여행 간다니 부럽다' 내지는, '그 여행도 못 가서 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냥 감사한 줄이나 알라'는 이야기가 퍽 많을 것이다. 만약 이런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이라면, 여행을 앞둔 마음가짐은 다른 어떤 이보다 무거우리라.
당신이 어떤 여행을 눈앞에 두고 있든, 즐거운 여행이었으면 좋겠다. 큰 기대와 해방감을 안고 떠나는 여행이라면 그만큼의 해방감 속에서 기대만큼의 행복으로 채워 왔으면 좋겠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이번 여행이 즐거움과 기대감을 가지기에 결핍이 느껴진다면, 막상 그곳에서는 마냥 행복했으면 좋겠다. 집이 그리워지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된 순간에도 한 조각의 아쉬움만큼은 그곳에 남기고 올 만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면 좋겠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 여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실망스럽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반가워 마지않는 상황이 되더라도, 적어도 그곳에 떠나려 공항으로 가는 그 기억만큼은 좋은 기억으로 남겨둘 수 있는 마음의 너그러움과 여유가 언제나 당신에게 있기를 응원한다. 우리가 살아있고 여행 갈 수 있는 날이 남아있는 한 공항으로 가는 즐거움은 언제나 간직할 수 있길, 그 즐거움은 남은 삶에 든든한 담보로 남겨둘 수 있길 바란다.
즐거운 여행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