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속지 말 것
오랜만에 그대들과 함께 했던 한국으로의 나들이는 아름다웠다. 특히나 그밤, 침낭을 덮으니 별과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던 충격적인 아름다움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일이 되겠지. 한 여름 밤의 별들과, 바위와 그리고 겹겹의 산들은 마치 수만년을 기다린 끝에 그밤의 우리를 위해 존재해온 것처럼 따뜻했다. 그곳에 처음 왔지만 언젠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함께 다녀갔던 장소처럼 낯설지가 않아서, 갑자기 지구가 세워 올린 무대장치 같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밤, 까마귀가 울던 산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이제야 왔느냐며 우리를 끌어안는 산을 말이다.
이제는 제법 목소리가 굵어진 첫째는, 별똥별을 보며 제임스웹 이야기를 했었고, 아이 티를 채 벗지 못한 둘째는, 아무도 없는 산 중에서 들려오는 동물 친구들의 소리에 관해 물었었다. 한 밤중에 무거운 짐을 메고 오르느라 힘들었을 테다. 힘들게 오른 산에 시원 바람 한 줄기가 땀에 흠뻑 젖은 몸뚱아리에 행복을 가져다줄 줄은 누가 알았겠느냐. 희미한 불을 밝히며 끓여 먹었던 라면 맛은 기가 막혔고, 그믐날 은은한 달빛을 받은 바위벽에 붙어 암벽등반 모션을 하며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고 깔깔대며 웃었던 그대들의 천진한 웃음이 여전히 환청처럼 들린다. 비록 밤새 모기에 뜯겨 다음 날 아침엔 12라운드를 치른 복싱선수처럼 얼굴이 죄다 부풀었지만, 그마저 좋았는지 서로를 보며 자지러지게 웃었던 그날이 나는 좋았다. 부디, 그날의 웃음처럼만 살아라. 행복해라, 그러나 행복에 속지마라. 행복이라는 천상의 것을 위해 지상의 모든 것을 갖다 바치지 마라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앞으로 견뎌가야 할 세상에서 행복주의에 속지마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행복주의, 행복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1. 삶은 행복 말고도 가치 있는 것들이 많다. 2. 행복을 느끼는 것이 충일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최종 목적은 행복이라 말했다. 오늘 여전히 사람들은 사소한 행위 하나에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행동한다. 사소한 일의 목적과 이유를 캐물어 들어가면 결국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대답이 나온다. 행위의 기준이 행복이라 강변한다. 그러나 행복이 최종 목적이 되면 삶에서 행복 외에 모든 것은 무용해질 수 있다는 걸 명심해라. 다른 것들은 행복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이다. 행위 자체의 기쁨이 아니라 행복의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되는 삶, 그러니까 삶 전체가 수단화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을 위해 견디는 지금의 불행, 고통, 억압이 정당화되며, 불행, 고통, 억압의 책임 또한 자신에게 오롯이 전가되는 무서운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불행한 사람 앞에서 또는 고통과 고민에 빠져 우울한 사람 앞에서, 억지로라도 웃어라, 웃으면 다시 행복해진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웃음을 강요하는 사회적 억압, 긍정주의자, 긍정심리학자들이 세상에 주입하는 잔인한 마취제다. 행복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라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확정하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 그렇다. 욕망의 근원을 알아야 하고 뿌리까지 들어가 진위를 판별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사람들은 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명품 핸드백을 원하고 나는 의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적 인간으로서 관계 속에 형성된 타인의 욕망일 가능성이 짙다.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선별하는 작업은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필수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 욕망은 내 관계의 전체다. 좋은 관계가 곧 좋은 삶이요, 좋은 삶을 원하는 내 욕망이 바로 나다. 좋다, 나쁘다는 어떻게 판별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다.
타인의 시선이 내면화된 삶을 사는 사람은, 좋거나 나쁘다는 선악의 판단이 타인으로부터 나오는 사람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판단력 또한 타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타인의 시선, 강자들의 생각, 나보다 힘 센 사람의 사유가 내 안에 들어와 행복을 느끼는 감정까지 지배한다. 타인의 이러한 감시와 적절한 처벌로서의 자기 억압이 내재된 인간의 광범위한 서식이 행복주의를 퍼지게 한다.
행복주의는 인간의 협소한 가치관에서 출발한다. 협소한 가치관은 인간을 병들게 한다. 협소한 가치관은 편견과 오독의 세계가 만든다. 그것은 맹목과 각종 지상주의, 중심주의를 잉태하는데 그것이 현실 세계의 한 사회, 또는 온전하고 의젓한 한 인간을 파고들 때 인간은 병 들고 무너져 내린다. 외모지상주의, 자기중심주의, 물질, 돈, 철학지상주의까지 모든 일방의 가치관과 풍요롭지 못한 극단의 지상주의는 협소한 가치관에서 비롯되고 또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외모지상주의자가 연인이나 아내의 에스라인이 무너질 때, 남자친구의 튀어나온 배를 맞닥뜨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편협하고 협소한 사유는 어쩌면 잡다한 상식들과 천한 시사들로 인한 것이어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의젓한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해체하고 제거하고 덜어내는 과정이 필수적일지 모른다. 행복주의는 거대한 허구임을 잊지 마라.
행복은 무엇인가에 대해 세상의 말들은 많지만 가장 간명한 언어로 설명한 사나이가 있었으니, 역시 그 또한 행복을 산을 통해 배운 이였다. 늘 생각한다, 산에서의 하루가 몇 수레의 책보다 귀하다. 1938년 인류 최초로 알프스의 아이거북벽을 초등한 ‘하인리히 하러’(1912~2006) 라는 사람이 그의 책 ‘하얀 거미’에 이렇게 써 놓았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최후의 영역까지 쏟아 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