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후 연재 '알피니스트' - 4
‘우린 모두 약간 돌았군.’ 이 말처럼 20세기 산악계는 누가 제대로 돌았는가를 놓고 벌인 거대한 ‘부은 간댕이 경연대회’였다. 대회는 각축장의 중심이 ‘높은 봉우리’에서 ‘어려운 벽’으로 바뀌면서 본격화된다. 물론 그 불은 앨버트 머메리가 당겼다. 알파인 저널리스트이자 등반사학자 월트 언스워드Walt Unsworth는 《알프스의 북벽North Face》에서 ‘북벽’의 선구자로 머메리를 꼽으며 1892년 머메리의 에귀 드 플랑Aiguille du Plan 북벽 등반을 ‘벽의 시대’의 시작이라 말한다. 그 등반에서 머메리는 실패하지만, 당대의 통념을 뛰어
넘은 전설적인 등반은 그의 오름 짓을 지켜보던 수많은 산악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확보물을 박으며 올라도 오르기 힘든 길, 수직으로 뻗은 엄청난 벽을 피톤 없이 절반 이상을 오르다 탈출한 머메리의 등반에 젊은 산악인들은 입을 있는 대로 벌리며 경악한다. 놀라움은 잠시였다. 가슴에 큰 자극을 받은 그들은 악마적 매혹을 뿜어내는 거벽의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다. 바야흐로 ‘알프스 3대 북벽’의 시대가 활짝 열렸으니 이때부터 하인리히 하러의 화려한 출현을 예고하고 있었다.
1930년대의 10년은 북벽의 시대다. 1931년 독일 슈미트 형제의 마터호른 북벽 등반, 1938년 이탈리아 신예 산악인 리카르도 카신Riccardo Cassin의 그랑드 조라스 북벽 워커스퍼Walker Spur 루트 등반과 함께 미완으로 남아있던 아이거 북벽에도 사람의 손이 닿는다. 1938년 7월 24일 독일팀 2명과 오스트리아팀 2명이 아
이거 북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들은 중간 지점에서 합류하여 연합했고 결론적으로는 초등에 성공한다. 이 연합대의 4인 중 하나가 하인리히 하러다. 그는 등반사의 이 기념비적 업적을 《하얀 거미》라는 책으로 남긴다. 하얀 거미라는 명칭은 아이거 북벽 루트의 정상 직전 가장 험난하고 악명 높은 눈사태 구간에서 따왔다. 멀리서 보면 암벽 사이로 잘게 뻗어간 눈 처마가 흡사 그물에 붙어 먹이를 사냥하는 거대한 거미의 몸통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아이거 북벽을 오르는 인간들을 하나씩 잡아 씹어 삼키는 악마의 거미, 아이거 북벽 등반 사고의 대부분은 하얀 거미를 돌파하는 중에 발생했다. 그러나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정상에 오를 수 없다.
대부분 산의 북벽은 오르기가 난해하다. 해가 들지 않아 추위에 맞서야 한다. 두꺼운 빙벽과 설벽이 녹지 않고 버티고 서 있어 깎아지른 경사를 극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낙석과 눈사태 위험이 커 등반 확률을 신에게 맡겨야 할 정도다. 알프스 3대 북벽 중 마지막까지 인간의 발을 허락하지 않던 아이거 북벽은 북벽 중의 북벽이었다. 등반 초입부터 수직고도 1,800미터로 뻗은 벽을 올라야 한다. 게다가 가파른 사면에는 신설과 얼음이 뒤섞인 낙빙, 낙석 사태가 시시때때로 일어나 60여 명이 넘는 젊은 등반가들이 이 벽에 도전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 어떤 산보다 사망자 기록이 많다.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산악인을 죽음으로 내몬 이 벽을 악마의 벽이자 클라이머의 공동묘지라 불렀다. 그러나 수많은 죽음으로 인해 ‘벽에서 살기 위한’ 등반 장비의 비약적인 발전을 촉발했으니, 오늘 바위를 오르는 등반가들의 선진적인 장비는 이들의 죽음에 힘입은 바 크다. 얼
음에서, 바위에서 누구든 경건해야 할 이유다.
누군가 등반가를 구분하여 정의하기를 아이거 북벽을 오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대 최고 난도의 벽이자, 여전히 알피니스트를 가르는 척도로 아이거 북벽은 벽의 대명사다. 세상의 벽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산악인의 벽은 아이거 북벽이다. 도전의 성스러운 고향, 같은 마음을 지닌 자들이 명예롭게 오르다 산의 품에 안긴 곳, 바로 ‘The North Face’다. 지금도 산악인들은 메카를 가듯 성스러운 성지 순례의 마음으로 아이거 북벽을 오른다.
아이거 북벽 첫 도전의 기록은 1935년이다. 다른 벽에 비해 한참 늦었다. 그만큼 어렵기도 했으며 접근을 불허하는 벽이었다. 첫 도전은 비극이었다. 뮌헨 출신의 두 산악인은 아이거 북벽 중단까지 진출했지만 5일을 매달린 끝에 동사한다. 이듬해 도전한 또 다른 4명의 젊은 산악인, 안데를 힌토 슈토이서, 토니 쿠르츠, 빌리 앙게러, 에디 라이너는 아이거 북벽의 초입부터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며 올랐지만, 벽 위에서 루트를 잃고 눈폭풍을 맞아 추락한다. 이 과정에서 추락하는 안데를 힌토슈토이서와 자일을 함께 묶었던 에디 라이너는 자일에 감겨 죽었고 같이 연결된 빌리 앙게러는 벽에 매달려 오도 가도 못해 동사했다. 어렵사리 탈출에 성공한 토니 쿠르츠마저 구조 직전에 입은 동상으로 왼팔을 쓰지 못해 어설프게 묶은 자일 매듭이 풀리며 허무하게 추락하여 죽고 만다. 아이거 북벽에서 죽은 시신은 오랫동안 기괴하게 암벽에 남아있었다. 보다 못한 스위스 정
부는 아이거 북벽 등반을 2년간 금지했고 하인리히 하러는 등반금지령이 풀리기만을 기다려 1938년에 아이거 북벽을 마주한다.
하인리히 하러가 아이거 북벽을 오른 다른 이유는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원으로 선발되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는 무명의 젊은 산악인이었고 히말라야를 오르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정적 ‘한 방’을 보여줘야 했다. 그때 그의 눈에 아이거 북벽 초등자라는 타이틀이 들어왔다. 1938년 7월 21일, 눈과 얼음이 안정적으로 얼어있는 새벽 2시, 그의 역사적 등반이 시작된다. 등반 파트너 프리츠 카스파레크Fritz Kasparek는 당대 최고의 등반가로 오스트리아에서 이름을 떨치던 사내였다. 그들의 등반 초반은 순조로웠다. 세 번째 아이스필드에 다가설 무렵에는 그들을 무섭게 추격하는 2인 1조의 등반팀을 발견한다. 안데를 헤크마이어Anderl Heckmair와 루드비히 뵈르그Ludwig Vörg로 구성된 독일팀이었다. 독일팀의 등반 속도는 경이로웠다. 처음엔 저 멀리 개미처럼 꾸물거리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코앞까지 따라 붙었다. 하러와 카스파레크보다 하루나 늦게 출발했음에도 거의 쫓아온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안데를 헤크마이어는 당시 두 개의 프런트 포인트가 추가된 열두 발 아이젠을 최초로 고안한 대장장이 그리벨Grivel이 만든 크램폰을 신고 있었다. 신발의 코 전면과 바닥 전체에 크고 긴 스파이크를 만들어 얼음과 눈을 자유자재로 찍어가며 마치 땅 위를 걸어가듯 갈 수 있게 고안되었다. 이 혁신적인 장비를 착용하고 유유히 그러나 전광석화의 속도로 올랐던 것이다. 지금은 보편화된 겨울철 워킹과 빙벽등반 필수 장비인 12발 크램폰crampon이 등반사에 첫선을 보이던 장면이다. 더구나 하러와 카스파레크는 무거운 아이젠이 등반 속도에 영향 미친다 생각해서, 아이젠이 필요 없는 설벽 지대는 하러가, 빙벽 지대의 선등先登은 카스파레크가 전담하는 전략을 세웠던 터였다. 아이젠조차 없이 눈밭에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던 하러에게, 헤크마이어의 빛나는 구리빛 크렘폰은 더욱 더 눈부셨을 테다.
어느새 하러와 카스파레크는 독일팀에 선두를 내주게 된다. 엎치락뒤치락 하던 두 팀은 그날 밤 비박지에서 만나게 되고 진을 빼놓는 이 등반에서 동업자로서 마주한다.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절벽에 매달려 그들은 땀으로 범벅이 된 젖은 옷으로 눈폭풍이 부는 밤을 함께 견딘다. 욕지기가 절로 나오는 순간에 그들은 같은 처지의 서로를 마주 보며 한바탕 웃음으로 한 팀이 된다. 죽음의 절벽에서 웃음이 가시고, 현실이 자각되면, 그리운 건 저 땅 밑에서의 즐거웠던 기억이었을 테다. 이때를 회상하며 하인리히 하러는 말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어느 위대한 철학자가 답하기를 ‘밀크 스프, 편안한 잠자리, 거기에 육체적
인 고통이 없을 것. 그것도 과하다.’라고 했다. 우리는 거기에 더해 마른 의복, 믿을 수 있는 하켄, 맛있고 생기
가 돋아나는 느낌을 주는 음료만이 아이거 북벽에서의 최대 행복이라 하겠다. 진정으로 우리는 행복했다.”
- 하인리히 하러, 《하얀 거미》, 64p
이튿날 한 팀이 된 그들, 희대의 등반가들은 악명 높은 하얀 거미 지대까지 진출한다. 악명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정상 직전의 거대한 수직 눈 더미, 하얀 거미 지대를 막 비껴갈 찰나, 거짓말 같이 눈사태가 쏟아져 내린다. 수직벽에서의 눈사태는 곧 죽음이다. 낙석과 함께 모든 걸 쓸고 내려가므로 가느다란 아이스 피톤과 하켄은 무용하다. 엄청난 굉음의 눈사태를 온몸으로 받으며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던 순간, 연이어 두 번째 눈사태가 그들을 덮친다. 생존의 출구는 사라졌다. 카스파레크의 손은 낙석으로 인해 골절되고 하러는 수직의 벽에 머리를 처박고 다만 살아있기를 소망할 뿐이다. 헤크마이어는 초인적인 힘으로 순식간에 때려 박은 하켄에 매달리면서 미끄러지려는 같은 팀 뵈르그의 목덜미까지 오른손으로 잡은 채 이가 부서져라 깨물며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모두 휩쓸려 죽었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강력한 눈사태가 지나가고 아이거 북벽엔 고요함만 남았다. 그러나 살아있다고 느꼈던 사람부터 적막한 거벽에 고함을 치며 동료를 찾았다. 기적이었다. 모두 살아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죽음을 견뎌냈다.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긴 그날 밤의 기록이다.
‘우리들은 때때로 행복을 체험한다. 그 행복은 한참 지난 후에야 깨닫기도 한다. 그때 나는 행복하였노라고.
아이거 북벽에서 이번 비박지는 가장 옹색하지만, 또 가장 즐거웠다. 지난 몇 시간, 만약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낙오됐거나 단 1초라도 용기를 잃었다면, 지금 다 함께 상쾌한 기분을 음미하지 못했을 것이다.’
- 하인리히 하러, 《하얀 거미》, 111p
이튿날, 1938년 7월 24일 오후 3시 30분. 마침내 그들 네 사람은 정상에 오른다. 정상에서 그들은 ‘단지 묵묵히 악수를 나누’고 등반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등반을 끝낸다. 생사를 넘나들 때마다 저들이 말한 것은 행복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그들은 왜 행복을 불러낸 것인가. 적어도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이 볼 때 죽으려 달려드는 그들이 직면한 상황은 분명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젖은 등산복이 아니면, 단지 한 모금의 물만으로 어째서 그들은 행복할 수 있었던가. 그들은 행복의 정의를 다시 썼다. 그들에게서 행복의 재탄생을 본다. 그들에게서 말이 아니라, 몸으로 말하는 행복을 본다. 그들은 사지에서 행복했다. 우리는 평지에서도 불행하다. 늘 행복을 갈망한다. 그러나 억지로 행복을 좇는 행복주의는 필연적인 불행을 안고 있다. 다시 말하면, 행복의
뿌리는 불행이다. 아침에 따뜻한 커피 한 잔, 산 중턱 시원한 바람 한 줄기, 손꼽아 기다리던 여름 휴가, 연인과의 키스, 불행을 잠시 잊게 하는 것들을 행복이라 말하지만, 그 약발이 다하면 이내 불행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니 행복이라는 건 삶에서 불행을 잠시 잠깐 지우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불행도 행복의 감정에 찾아오는 환영 같은 것이어서 마냥 행복이 지속되면 그건 행복이 아닐 테다. 불행과 행복은 서로를 행복과 불행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니 행복하다, 불행하다 떠들지 않고 시간을 밀치며 그저 사는 게 방법일지 모른다. 오늘 ‘좋아요’를 받았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고 내일 ‘좋아요’를 받지 못해도 실망할 일이 아니다. 절망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듯 희망도 사실은 무용하다. 희망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종국에 절망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삶은 행복과 불행 타령이 아니라, 불안과 고통을 짊어진 채 거대한 거인의 등껍질을 걸어가는 산행이라고, 산은 자신의 등을 보이며 조용히 말하는 것 같다. 산길을 걷다 스스로 깨닫는다. 하인리히 하러와 루드비히 뵈르크, 안델 헤크마이어, 프리츠 카스파레크, 그들의 행복은 욕망의 뿌리를 걷어내는 것, 이른바 자유의 경지는 사실 별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문제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 자신의 욕망과는 아무런 관련을 짓지 않는 태도였음을.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으면 그것이 자유다. 아이거 북벽의 등반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단지 따뜻한 물 한 모금이 필요했을 뿐이다. 지극히 낮은 욕망의 뿌리를 가졌으며 죽음을 앞에 두고 그 뿌리까지 걷어낸 인간들이었다. 아, 이제 알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묘비명처럼, 행복의 진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이었다.
행복이란 천상의 것을 위해 지상의 것을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복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그친다. 행복이 최종 목적이 되면 삶에서 행복 외에 것은 무용해진다. 다른 것들은 행복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행위 자체의 기쁨이 아니라 행복의 수단으로써의 기능이 되는 삶, 그러니까 삶 전체가 수단화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삶은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되었으므로 행복을 위해 견디는 지금의 불행, 고통, 억압이 정당화되며, 불행, 고통, 억압의 책임 또한 자신에게 오롯이 전가되는 무서운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수 있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웃음을 강요하는 사회적 폭력이나 다름없다. 삶의 모든 것이 갈려 나가도 여전히 억지웃음을 지어야 하는 긍정주의자, 사회의 구조적 불행을 개인의 부정적인 무의식으로 진단하는 긍정심리학자, 위로 트렌드가 돈이 되니 아무나 위로하려 드는 힐링 산업의 업자들이 세상에 주입하는 잔인한 마취제다. 타인의 시선이 내면화된 삶을 사는 사람은, 좋거나 나쁘다는 선악의 판단을 타인에게 의존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이런 타인의 시선, 강자들의 생각, 나보다 힘센 사람의 사유가 내 안에 들어와 행복을 느끼는 감정까지 지배한다. 즉 타인의 감시와, 타인과 다르게 산다는 것에 대한 적절한 처벌로서의 자기 억압이 내면화 된다. 자기 억압이 내면화된 인간의 광범위한 전염이 행복주의를 퍼지게 만든다.
행복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세상의 말들은 많지만 가장 간명한 언어로 설명한 사나이가 있었으니, 역시 그 또한 행복을 산을 통해 배운 이였다. 늘 생각한다, 산에서의 하루가 몇 수레의 책보다 귀하다. 1938년 인류 최초로 알프스 아이거 북벽을 초등한 사람 중 하나인 하인리히 하러는 그의 책 《하얀 거미》에 이렇게 써 놓았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최후의 남아 있는 마지막 힘까지 쏟아 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