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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Mar 21. 2024

결론은 산

산이라는 북과 트럼펫 - 서문 


가끔, 주간보고 하러 태어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무실에 떠도는 반듯하게 닦인 말들에 지치고 생활이라는 징글징글한 단어와 섞여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다 보면 내 삶도 세월에 닦여가는 듯하다. 시시하다. 내 젊음이 한 평 사무실 모니터 앞이라는 사실은 구멍 난 양말같이 볼품없고 남루하다. 지금 가고 있는 길에
대한 구토와 새로운 길에 대한 선망이 어지럽게 자신을 괴롭힐 때, 자주 산으로 달라뺐었다. (예의 된소리와 방언은 표준어보다 상황 묘사가 적확한 경우가 더러 있다) 권태를 견디지 못해 끔찍한 예능을 틀어버리기 전에 회사룩을 벗어던진다. 등산룩으로 갈아입는다. 손 닿는 것들을 무심하게 주섬주섬 꾸려 불룩해진 배낭을 들쳐 멘다. 한 주간 겹치고 쌓인 억울의 상태가 산에서 놓여난다.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깊은 밤 홀로 텐트 없이 산에 누워 침낭 안으로 재즈를 추듯 몸을 비틀며 들어가면, 놀라워라, 별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 참은 웃음이 입술 위를 기어가다 간신히 사라진다. 산은 왜 이제야 왔냐고 말하고, 나는 이내 입꼬리를 바로 한다. 웃음기가 사라진 눈엔, 전전하며 지낸 삶이 가로등 도열하듯 지나가더니, 청승맞게 도르르….


산은 삶의 산문성을 달래주는 한 조각 운문성이다. 긴 글을 단락끊어가며 읽지만, 생략과 도약이 있고 가파르게 지르다가도 휘휘 돌아가는 시성詩性에 목마른 것처럼 이 땅의 사람들은 닭장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산 냄새가 난다. 집에 창을 열면 늘 산이 보이고, 출근길 전철에 몸을 실어도 산이 보인다.

깨끗한 무균의 삶을 살고 있지만, 지하철 너머로 보이는 북한산을 볼 땐, 거대한 짐승의 등짝 같은 저 흰 화강암 위를 걷는 상상을 한다. 지금 저곳에선 신선이 모여 앉아 술 시합하고 있을 것만 같다. 약간의 피곤함이 늘 동지처럼 어깨에 얹혀 있어도 몸은 언제나 중력을 거스르는 오름으로 목마르다. 길 아닌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산은 내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북과 트럼펫이었다. 일상에 스러지고 너저분해진 나를 산은 다시 일으켰다. 내 심장의 박동은 산의 리듬으로 뛰었는데 나는 그 북소리의 진원을 알고 싶었다.


산은 나의 영웅이어서 신 같은 영웅을 알현하려 무던히도 달려들었던 것이다. 왼쪽 발목이 부서지고 어깨 인대가 으스러져도 내 마음 안에서 요동치는 진군의 나팔을 거스르지 않았다. 마침내 산이 내게 보여준 보물 같은 이야기를 이곳에 풀어낸다. 그 내밀한 이야기와 함께, 처음 뒷산에 오르는 마음, 암벽의 첫 홀드를 잡는 순간부터 시작하며 평지돌출, 좌충우돌의 곡절을 함께 발 맞추며 오르고 싶다. 길이 가파를 땐 잠시 쉬며 역사적 등반가들을 우리 옆에 불러 앉히고, 그들이 오른 푸릇푸릇한 산들과 붉은 열정의 바위를 조곤조곤 얘기하면서. 정상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천연하게 앉아 세상을 조망하며 말한다. 그대의 배낭, 바지, 등산 장비에 새겨진 산악인들의 서사와 종주등반, 원정등반, 개척등반이라는 다소 전문적인 세계까지 얘기하니 쌀쌀한 날씨에 조금 추워진다. 수다를 그치고 내려가자. 이제 내려가면, 산은 올라올 때보다 저만큼 가까이 와 있을 테다.


산은 알록달록한 신세계다. 산은 색깔이다. 우리 삶이 무채색이라면, 산은 언제나 사건과 몰락이 기다리는 푸르고, 붉은 속살을 보여주며 형형색색의 삶이 무엇인지 말한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가더라도 산과 우리 사이에 안테나가 있다면 산이 보내는 전파를 직선으로 감지할 수 있다. 몸으로 올라 땀 흘린 뒤, 산과의 아름다운 교감을 느낀다. 산이 주는 강렬한 전압, 그 느낌에 머물러 보라. 그리고 다시 오르고 싶은 달뜬 마음에 신열을 앓을 수도 있다. 그때가 산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다. 이제 단지 뒷산을 오르더라도 히말라야 거벽을 넘나들던 인류의 산쟁이들이 그대의 백그라운드가 되어 보우할 터이니, 드디어 우리는 세상에 겁먹지 않게 될 테다. 산이 보여준 것은 ‘쫄지 않는 삶’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도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절대 긍정의 내 편이 거대한 산의 모습을 하고 내 앞에 떡, 하고 나타난다. 놀라지 말자. 


지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으로 구성된 대가족이 알피니스트다. 그들 중하나라도 사라지면 모든 알피니스트는 온몸으로 눈물 흘린다. 지금 등산화를 고쳐 매고 허벅지에 힘을 주고 걸으면, 알프스 대빙하를 누비던 앨버트 머메리가 우리의 할아버지가 되고 돌로미테에서 돌을 떨어뜨려 등반선으로 삼았던 디렉티시마의 원류 에밀리오 코미치 디마이는 우리의 형제가 된다. 14좌를 무산소로 오른 최초의 인류 라인홀트 메스너를 큰형처럼 텐트에서 안주거리로 삼고, 정상을 코앞에 두고 일부러 돌아선 보이테크 쿠르티카를 철학적으로 사숙할 수 있다. 이 모두가 오늘 산 오르는 형제들을 양팔 크게 벌리고 보우하리니, 동네 건달 열 명이 에워싸더라도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이 그대를 감쌀 테다.


환영한다, 그댄 이제 산쟁이, 몸으로 하는 가장 순도 높은 절정, 이제 화강암에 뺨을 비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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