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
‘자기 스스로 어떠한 결정도 내려 본 적 없었고 명령으로 둘러싸이도록 항상 극단적으로 조심했으며 자발적 제안조차 원하지 않아서 항상 지시해 주기를 바란’ 사람.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내린 평가다. 그녀는 전범 재판의 전全 과정을 르포 형식으로 취재하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 책의 말미에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본 재판의 유일한 교훈이라 말하며 자신의 말과 생각을 잃어버린,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 자들이 맞닥뜨리게 될 대파멸을 경고한다. 책을 덮고, 긴 시간도 필요 없이 나는 ‘아이히만’에 나를 포갰다. 내가 만약 ‘아이히만’이었다면 모든 명령을 거부하고 커다란 웅덩이에 총구가 겨눠진 사람들을 살려낼 수 있었겠는가. 누군가 시키는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월급쟁이의 미덕이다. 결과적으로, 내게 주어진 일이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숱한 불만과 타오르는 정의감, 치밀어 오르는 모욕은 월급 앞에서 늘 작아졌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겨 가슴에 불화살을 당겨도 막상 그 기회가 찾아오면 슬그머니 발을 빼고 스스로 졸아들었다. 시키면 해야 했고 시킨 일을 하지 않으면 월급은 멀어졌다. 나는 16년을 이런 미덕이 최고인 사회와 조직에서 살아낸 뼛속까지 월급쟁이다. 나는 아이히만을 비난할 수 없다는 무거운 사실에 절망했다. 훗날 내 아이가 내 삶이 어땠는지 물어오면 대답을 얼버무리다 결국엔 무거운 입을 놀려 “야야, 아부지는 그냥 밟으면 밟히는 사람이대이” 힘없이 말하고 고개를 떨굴까 나는 두려운 것이다.
현대는 노동의 시대고 근면의 시대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누가 더 빨리 주어진 일을 해치우느냐로 평가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를 일러 니체는 ‘현대적이고 소란스럽고 시간을 모조리 써버리면서도 자부심에 차 있는, 어리석은 자부심을 가진 근면’이라 일갈하며 인류에게 가장 해로운 인간 군상의 탄생을 비틀어 말했다. 니체의 우려와 아이히만의 어리석음을 믹서기에 넣고 절묘하게 돌려내면 현대적 월급쟁이의 초라한 시민성이 갈려 나온다. 두 사람은 월급쟁이의 ‘지금’과 가장 근거리에 인접한다. 한 사람은 무사유로 시간을 허송하는 인간을 우려했고 다른 한 사람은 생각 없는 ‘평범성’도 악의 끄트머리에 닿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는 누구나 니체의 우려와 아이히만의 어리석음 사이 어딘가에 있다.
나는 얼마 전부터 회사 업무와 자기성장을 연결 짓는 세상의 말들을 믿지 않게 됐다. 자본의 적나라한 형태인 펀드 회사가 클릭 몇 번으로 회사를 사들이고 또 팔아댄다. 사고 팔리는 회사 안에서 한 자리 차지하며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소명할 수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은 결국엔 금융 자산가들의 배를 불리는 하수인 역할에 지나지 않을 텐데 현대판 마름에 지나지 않는 일을 하며 자기성장이라는 열매를 맺는다면 그 열매는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회사’, ‘기업’이라는 집단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목적, 목표에서 나는 어떠한 정당성도 보탤 수 없다. 월급과 맞바꾼 삶치고는 모욕적인 배역이라 늘 생각한다. 굳이 이렇게 무거운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너무 나아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나는 월급쟁이다. 월급쟁이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한 ‘아이히만’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리라 다짐한다. ‘생각 없이’ 스스로를 일상의 평범성으로 밀어 넣으며 잔인한 웃음을 짓고 싶진 않다. 비록 월급쟁이 삶을 단번에 바꾸진 못하더라도 스스로 내린 세상의 가치를 상정하고 내 생각을 갖추어 나가는 일을 멈추지 않기 위한 몸부림을 거듭하고자 한다. 발랄하게 말하자면 월급쟁이 사유 여행이다.
세계를 해석하고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표면적인 것을 볼 수밖에 없다. 그 표면을 현장이라 불러도 좋고 생활이라 불러도 좋다. 우리가 깊어지기를 원한다면 표면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현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세계를 볼 수 있는 근사한 방편을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리스인들이 삶의 표상을 사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나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다. 피상적이고 천박해 보이는 삶의 표면에 내가 원하는 것들이 촘촘히 박혀 날아든다. 그것은 깊은 심연을 가지고 있다. 깊이 박혀 있는 혀뿌리가 가끔 헛소리를 하게 만드는 것처럼 월급쟁이의 저열한 조직 논리와 현상들은 세상이 제 본 모습을 드러내는 세상의 헛소리와 같다. 헛소리를 간파하면 그것들이 표면에 나타나게 된 충동을 알아낼 수 있다. 그 충동의 심층으로 내려가 채굴하면 월급쟁이 정체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발가벗겨진 추악한 그 모습. 월급쟁이에겐 악취가 진동한다. 분노, 역설, 욕망, 부조리, 거기다 기업은 이익추구 집단이라는 본질적 천박함을 표방한다. 월급쟁이는 그 안에 부속이자 톱니에 해당하니 우리는 이 평범성과 일상성, 노예성으로부터 늘 탈출을 꾀해야 하는 신세다.
변신, 변화, 혁명은 정초된 정체성을 밟고 일어서서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만든다. 나는 월급쟁이다. 이 정체성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재미없고 갑갑하다. 월급쟁이는 내 모든 정체성을 먹어버리는 잡식 괴물이다. 언젠가 죽여야 할 정체성이다. 그러나 월급쟁이에 관한 연구는 내가 월급쟁이일 때 해야 한다. 나는 자신을 만나기 위한 치열한 물음과 시도를 포기해 버린 적이 많은데 내가 여전히 월급쟁이일 때 얼마나 진절머리나는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제대로 보기 위해선 아직 현장이 필요하다. 현자인 체하며 먹고 살 일을 걱정하는 사람들, 아직도 그 사람들 속에 있는 나, 그 안에서 보고 듣고 느낀 기이함을 앞으로 써보려 한다.
월급쟁이의 정신적 아버지였던 ‘구본형’은 강한 자의 정신을 강조했다. 노예적 삶을 청산할 줄 아는 자들로 세상이 덮이기를 바랐다. 나는 그가 말년에 왜 시로 옮아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은 요약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모든 텍스트는 요약과 편집과 축약이지만 삶은 요약할 수 없다. 한 줄 가십으로 엮어내는 신문과 뉴스는 얼마나 가혹한 세상의 요약인가. 이 어처구니없는 유용성의 세계는 늘 해석이라는 걸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을 요약된 세상의 배후를 간파해야 하는 숙제 속에 놓인다.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짓누르는 세상의 억압이 이러하다. 이렇게 세상은 우리를 억압하고 억압하는 억압까지 억압한다. 시는 정신의 가장 섬세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세상이 가하는 보이지 않는 억압을 드러내고 보여주면서 요약된 인간들의 세상이 얼마나 얄궂은지 알게 하는 것이다. 나는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앞으로의 글에서 월급쟁이를 억압하는 세상의 언어를 독해하고자 한다.
가끔 월급쟁이를 조망하는 역사적 시선으로 글을 쓸 수도 있다. 월급쟁이 단조로운 삶을 알레르기처럼 싫어했던 사람들을 불러 앉힐 수도 있다. 일하지 못해 안달이고 일하기 싫어 안달이다. 일하는 자, 노동하는 자, 노동하여 대가를 받는 자, 월급쟁이의 광범위한 번식을 우리는 예견했는가. 내 아버지는 월급쟁이였다. 나도 월급쟁이다. 월급쟁이 아비가 월급쟁이 딸과 아들을 낳는다. 나를 알기 전에 월급쟁이 그 맹렬한 운명의 굴레를 먼저 알아야 한다. 나는 월급쟁이에 관한 글을 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