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 연구를 시작하며
3년 전 이맘때였다. 12년간 일한 회사에서 나오기로 마음 먹었다. 혼자 마음 속으로 퇴직을 결심한 날, 퇴근하던 버스 안에서 이유 없는 눈물을 흘렸다. 억울할 것도, 아쉬운 것도, 후회도 없었지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참아내지는 못했다. 세월에 받치는 눈물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긴 시간, 회사를 다니는 동안, 결혼을 했고 아이 둘을 낳아 길렀다. 전셋집을 세 번 옮긴 끝에 내 집 하나를 마련했고 이름 없는 사원에서 팀장까지, 많은 일이 그야 말로 도열된 가로등을 최고 속력으로 지나가듯 흐른 시간이었다. 이후 나는 눈물이 눈에 띄게 많아 졌는데 눈물 많은 내가 스스로 마음에 들었다.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울고 싶은 일이 많지 않은 사람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 여기지만 세상이 어디, 얼굴 무너져라 웃고만 지낼 수 있던가. 잘 울어야 잘 웃는다는 게 내 개똥 지론이다. 그 해 여름, 해마다 불입했던 퇴직연금을 받았다.
나는 해외로 나왔다. 아이들과 아내를 모두 데리고 겁 없이, 같잖게도 내 제국의 지평을 넓히겠다며 보무 당당하게 한국을 떠나왔다. 이로써, 국내와 해외에서 직장 생활을 모두 해 본 인간이 되었지만, 나는 월급쟁이였다. 그때도 지금도 월급쟁이다. 해외에 나왔다고 해서 징글징글하게 따라다니는 엑셀과 PPT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때 불현듯 알게 되었다. 다른 길을 가겠노라 나선 길에, 같은 길로 들어서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밥의 덫에 걸려들었다. 먼 곳에 왔다고 다른 삶이 기다린 건 아니었다. 더 후퇴된 일상에 자괴감만 제대로 확인할 뿐이다. 매일 저녁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좋았고, 낯선 이국에서 주말마다의 여행도 아름다웠지만 내 인생을 버드 뷰로 봤을 땐 여전히 월급쟁이 정체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쯤 하면 월급쟁이는 도대체 나에게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월급쟁이를 하며, 경험과 인생을 녹여낸 불후의 보고서 하나를 내 놓는 게 큰 바람인 적이 있었다. 숱한 일을 겪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경험하면, 답 없는 일에 혜안들이 정렬해서 매직아이처럼 떠오를 줄 알았다. 간혹 퍼뜩 떠오르는 답도 있었고 그 답이 정답일 때도 있었지만 삶이 어디 그런가. 내 삶이 이리도 복잡한데 사람들이 모인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참으로 복잡다단하고 다종다양하다. 분명 경험이라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겠지만 그런 보고서라는 게 무참한 노예적 바람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참으로 오래 걸렸다. 주어진 일은 성심껏 한다. 맡겨진 일은 틀림없이 해 낸다. 그러나 처리해 나가는 일이 내 삶이 되진 않기를 나는 다시 바란다. 일로써 얻어진 경험이 혹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다 하더라도, 남의 완벽함을 위해 나의 완벽을 소진하는 일들이 내 삶에 끼어들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거칠게 말하면, 남의 돈을 벌어먹는 건 굴욕이다. 사납게 말하면, 돈을 받고 노무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굴욕들의 합이 월급이다. 내 월급에 그들이 주는 굴욕은 표면에 없지만 굴욕 안에서 월급이 만들어지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그 굴욕을 보완하거나 회피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피할 수 없고 받아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엄정한 월급 앞에 사람들은 늘 당면해있다. 굴욕을 감당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은 월급을 팽개치거나 더 나은 주인을 찾아 나섰고, 더 많은 사람들은 갖은 굴욕을 운명이려니 받아들이고 삶의 처지에 주저앉는다. 이 대목에 이르면 삶은 더 이상 아름답지가 않다. 전개된다는 허망한 그 과정은 굴욕에 굴욕을 더해 굴욕으로 나아가다 결국 버려지는 무참함이다. 우리는 이겨낼 수 있는가.
삶은 스스로 살아내는 추동력이 있다. 자신이 어떻게 사는 지 알지 못하는 중에도 스스로의 관성 대로 자신을 이끌어 가는 어떤 것이 있다. 시간을 밀쳐내며 그냥 삶이 전개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이어져 마치 소설처럼 어떤 줄거리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줄거리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 소위 의지 will라고 말한 것에 의해서,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자기에 의해서 움직인다.” 지독한 염세주의자도 이처럼 말하는데 내 평생 월급쟁이 하다 죽을 순 없다. 그러나 월급쟁이를 그만 두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나에게 월급쟁이 정체성은 무엇이었나’에 답을 할 것. 그저 잡문에 지나지 않을 테고, 오로지 나를 위해 쓰여질 글이겠지만 나는 월급쟁이를 부러뜨린 뒤에야 인생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오랜 월급쟁이 생활을 하며 그 안에 살았던 내가 누구였는지를 스스로 고민한 흔적이 될 터인데 한때 나의 모든 정체성이었던 직장인, 월급쟁이에 대한 찬사이자 위로요, 분노이자 아쉬움이겠다.
(‘월급쟁이 연구’는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개인적인 기획이다. 역사적인 인물과 저작에서 월급쟁이 관련 글을 발췌해 내고 그 글들에 나를 비추어 ‘감어인’ 鑑於人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