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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May 02. 2019

주인과 노예

노동절에 부쳐

주인과 노예 2019.05.01

 

누군가 나에게 노동과 노예가 무엇이 다른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나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있었는데 고민하는 나를 제쳐두고 성급하게 그가 말하기를 누군가 시킨 일을 하는 사람은 노예요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노동이라 말했다. 결국엔 ‘주인의식’을 침 튀기며 말하길래 머릿속에서 어여 지우려던 참이었다. 일견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다 여기고 그날 모든 대화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집에 돌아온 내내 석연찮다. 과연 그런가, 논란에 여지가 있겠다 싶어 생각을 정리해 본다. 노동절에 일하는 노동자가 30%라는 기사에 쉴까 생각했던 마음편지도 묵직한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 마침 노동하는 사람들의 날, 노동절 아침에 노동에 관해 말하게 됐다. 


주인의식은 마름이 하는 생각이다. 주인은 주인의식이 없다. 필요도 없다. 주인의식은 주인 아닌 자들이 주인을 대리해 일을 도모해야 할 때 생겨난다. 현대의 주인의식은 대부분 월급쟁이의 상위에 있는 자, 그러니까 자신이 노동자라 생각하지 않는, 주인에 버금간다 여기는 고급노예들의 외침이다. 주인이 누구인지 의식하는 것이 주인의식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생겨나는 건 외치는 자들의 그 안쓰러운 한계 때문일 게다. 오직 노예만이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다. 로마인들에 따르면 노예는 ‘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자’ 다. 로마시대는 물론 근대 이전의 경제활동에서는 주인과 노예가 엄격하게 구분된다. 근대 이후로 들어서면 그 사회계층적 경계는 흐릿해지지만 심층적 계급 관점에서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다만 ‘주인의식’이 함양된 노예가 많아 제 자신이 노예가 아닌 것으로 여기는 자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김규항 선생에 따르면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는 두 가지 소망을 갖는다고 말한다. 고급노예가 되는 것, 친절한 주인을 만나는 것. 이어서 그는 전자가 오늘날 부모들의 소망이자 교육의 목표가 되었다고 일갈한다. 후자는 노예 스스로 노예임을 자각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철저한 구조 속에 매몰시킨다고 말한다. 결국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는 노예로부터 시작된다고 역설한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19세기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노동자에게 머리가 달려 있음을 불평했던 사람이다. 대량생산방식의 초석을 다지며 현대 경영을 잉태한 자로 여전히 추앙 받고 있는 사람의 생각이었다. 이후 ‘주인의 생각’은 장족의 발전을 거두었고, 지금에 이르면 분업화 작업의 노동자 즉 육체노예를 훌쩍 뛰어 넘어 이 시대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자들이 앞 다투어 주인들의 물건을 ‘얼마나 많이 팔지’를 고민하게 하고 그 고민이 삶의 전부가 되도록 만들었으니 가히 주인의 승리라 불릴 만 하다. 이른바 임금 수준이 높은 고급노예를 만들고 주인과의 대등함을 넘어, 바로 주인임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주인은 생각보다 명민하다. 목적을 위해 노동의 시간도 대폭 줄여 좀더 생산적이고 창의적일 것을 요구한다. 일부 선진적이라 일컫는 회사는 필요하면 줄어든 노동시간도 개인적으로 갖다 쓰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유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하여 얻어진 이문이 비용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논리를 선취하고 구조를 공고히 한다. 


노동의 메커니즘은 이 사회를 떠받치는 경제의 근간이다. 학교에서 줄기차게 배운 경제 3요소 토지, 노동, 자본 중에 으뜸이다. 내 아이 학원비도 내게 하고 오늘 저녁 식탁에 오른 고등어로 가족의 배를 불린다. 그럼에도 미래는 불안하고, 반복되는 업무는 지겹고, 누군가 시켜 하는 일에는 굴욕적인 어떤 것이어서 매일 아침 일터로 향하는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하루를 패배하며 시작하는 월급쟁이에게 노동은 양가적이다. 될 수 있으면 적은 시간을 일하고 가능하면 많은 임금을 받고 싶어 한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과연 시간에 맞는 보수를 받고 있는 것일까.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중세시대 (유럽) 사람들은 일년 중 반 정도만 일을 했다고 한다. 공휴일은 141일이나 되었다고 제시하며 “평일의 기하급수적인 확대는 노동자들이 새로 도입된 기계와 경쟁해야만 했던 산업혁명 초기의 특징이다. 산업혁명 이전 15세기에는 근로시간이 영국에서는 총 11시간에서 12시간이었으며 17세기에는 10시간 정도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19세기 전반의 노동자들은 그 이전 세기의 가장 빈곤한 계층의 사람들보다 더욱 열악한 조건에서 살았다. 우리 시대가 달성한 진보의 정도는 일반적으로 과대평가 된 것이다”

 나는 월급쟁이다. 16년을 월급쟁이 정체성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늘 노동했고 월급으로 생활했다. 생활, 이 평범한 말이 실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징그러운 말인지 나는 안다. 단지 살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이 내 삶의 모가지를 움켜잡고 옴짝달싹 못하는 에반스 매듭으로 매일을 조여온다. 벌어 먹기 힘겨운 생활, 존재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징글징글한 생활에 잗다란 기쁨에 만족하고 초라한 시민성만 남는 소확행에 안주하는 삶으로 전개되는 것이 나는 못마땅하다. 반복의 지겨움, 지시에의 굴종,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지낸 지난한 내 월급쟁이 정체성, 내 살기 위해 결국 자유로운 노동을 고민한다. 길항하는 두 가치, 내 안에서 자유와 노동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일까. 노동절 아침, 이국의 먼 나라에서도 여전히 월급쟁이 생을 마감할 수 없는 안쓰러운 노동자는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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