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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Feb 12. 2020

월급쟁이 사룡천하(四龍天下) 1

월급쟁이 사룡천하(四龍天下)


1부: 익숙한 것과의 결탁

그리운 시절이었다. 사무실 건물 옥상에는 이미 삼(三)용이 모였다. 하루 수천만 명이 숟가락을 들었다 놓는 대도심의 한 건물 옥상에 범상치 않은 그들이 서 있었다. 태양 끝에서 버드뷰로 봐도 무채색 인간들 중 단연 선명하게 빛나는 세 점이 옥상에서 반짝인다. 찌잉, 반짝. 대천피왕(大天P王)이 회색 페인트에 점점이 녹이 쓴 육중한 옥상 문을 열어 젖혔을 때 청룡엑신(靑龍E神)과 운무워달(雲霧W達)은 잡고 있던 연초를 허리 뒤 춤으로 감추고 대천피왕을 향해 깊게 고개 숙인다. 성해바장(聲海V匠)이 너그러운 웃음을 띠며 말한다. 어서 오시게. 사(四)용이 모였다. 


여여如如들 하셨나. 대천피왕은 짐짓 너그러운 표정으로 안부를 물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피(P)는 파워포인트다. 줄여서 피피티(이하 PPT)라 사람들은 부른다. 한때 그는 먼 나라, 그러니까 거지도 비만으로 살 수 있는 나라에 있는 마이크로 소프트라는 회사의 파워포인트 개발자와 알고리즘 다툼을 벌릴 정도로 이름을 드날렸던 PPT 계의 고수였다. 그의 손을 거쳐간 PPT는 마치 흑백사진이 청사진으로 변하는 듯 했고 일동만수의 경락을 건드리는 그의 기술에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3년 전이었다. 누군가 애니메이션으로 그의 PPT 능력을 시험하려 했을 때 이미지, 애니메이션, 서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도형 삽입’ 만으로 애니메이션 효과를 똑 같이 구현해 낸 적이 있었다. 그때 난다 긴다 하는 PPT 천상계 인간들이 모인 집단, PPT 올림푸스 신전이라 불리던 기획부서 인간들은 사색이 되어 벌어진 턱을 닫지 못했다. 수소문 끝에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불렀으나 중국 우한이 더욱 급하다 하여 오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벌어진 턱은 2박 3일간 닫히지 않은 채 월간 회의가 무기한 연기되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대천 하늘 아래 PPT로 자괴하는 어린 백성이 수없이 많음을 자각하여 기득권을 내던지고 일반 사원, 주임 행자들에게 PPT 비기 상자를 활짝 열어 모두 보급한다. 이로 인해 그는 인간에게 불을 선사한 프로메테우스에 비견돼 ‘PPT 프로메테우스’로 불리기도 했다. 사원들이 지르는 탄성의 데시벨만큼 그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적어도, 회사에서 PPT 사용을 금하기 전까지는. 


어느 날 사장의 지시로 PPT 사용이 전면 금지된다는 업무협조 공문이 날아왔다. 분초를 다투는 오늘날 경영환경에서 보고를 위해 PPT 작업에 쏟는 시간이 과도하다는 이유였다. 결정의 배경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문서작성을 발아래 무공 없는 자들에게 떠맡기고 천지 모르고 입으로 날 뛰는 임시직원들의 법력과 자질을 직접 검증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대천피왕으로서는 느닷없는 의문의 일격을 받은 셈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때를 맞추어 횡행했던 PDF는 PPT 작업의 진위 파악을 어렵게 하여 대천피왕의 손발이 묶여 버린다. 그날 이후, 순식간에 안색을 고친 부장의 갈굼에 대천피왕은 시달리기 시작했고 직장생활 12년에 남은 건 어디 가서 쓸 데도 없는 화려한 PPT 기술뿐임을 자책하며 재야에 묻혔던 것이다. 


표정관리 하느라 힘겹지만 능글능글한 미소를 멈출 수 없는 성해바장(聲海V匠), 성해(聲海), 바다의 소리가 아니라 소리 바다다. 지금은 잊혀진 그곳을 그는 사랑했다. 사내 보안정책으로 이젠 그곳을 방문할 수 없게 됐지만 지난날 온종일 진을 치고 그곳을 들락날락거렸었다. 수행의 결과는 눈부셨다. 언제 어느 때든 노래가 바다처럼 줄줄 나오고 바이브레이션을 기똥차게 감아내게 됐다. 성해바장(聲海V匠)의 V는 바이브레이션이다. 벌써 오래 전 일이다. 회사에서 그의 보고서에는 언제나 붉은 줄이 좌악좌악 그어져 있었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니 대리,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던 때였다. 보고서에 붉은 펜 질을 해대고 남들 보는 앞에서 성해바장에게 고성을 질러대던 부장은 퇴근 무렵, 술자리 건수를 고민하던 중 모두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 퇴근했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혼자 남은 부장이 분노의 전화질을 시도하던 그때 성해바장은 사자의 아가리에 머리를 처박는 배팅을 시도한다. 성해바장은 이왕 버린 몸, PPT와 엑셀, 워드를 모두 버리고 부장과 함께 대선진로(大鮮眞露)의 주신 디오니소스의 법을 따르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하여 낮에는 언어폭력을 견디며 밤에는 부장의 술자리를 꿋꿋하게 지켜냈다. 부장은 술자리에서 성해바장의 살살 녹는 추임새와 높은 자리의 외로움을 알아주는 간드러진 배려에 점점 마음이 뺏겨 버렸다. 


직장인이라는 가면은 군복을 입은 예비군과 같아서 디오니소스의 ‘기술’이 들어가게 되면 ‘직장인 페르소나’가 자신의 모든 자아를 뒤덮고 사회적 지위와 교양, 상식, 윤리를 사라지게 만든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간파했던 성해바장은 정신줄 놓는 연습을 연마한다. 노래방에서 모든 사람을 하나가 되게 만드는 성해바장의 퍼포먼스에 사람들은 무장해제 되고 부장은 더 이상 그를 나무라는 대신 특별승진에 그를 지목하게 된다. 몇 해 뒤, 급기야 부장이 인생무상무가 됐을 때 마치 건국공신에 봉하듯 부서의 후계자로 성해바장을 발탁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혀를 찼고 밤을 새워 일하며 업무성과를 내던 경쟁자들은 짐을 쌌다. 중이 떠나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들은 떠났지만 성해바장은 그들의 손가락질에 아랑곳하지 않고 트로트 바이브레이션 꺾어내기와 골프 스윙 연습에 여전히 낮에도 밤에도 여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해바장은 운명의 청룡엑신과 마주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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