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 전체주의
회사는 민주적 절차를 표방하는 전체주의다. 회사의 주인은 누구인가, 주주다. 주주는 자신이 가진 주식의 수량만큼만 책임을 지고 권리도 요구할 수 있다. 특정 주주가 주식 과반을 보유하거나 전체 주주 중 가장 많은 주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회사의 주인이다. 주주 체계는 민주적으로 보인다. 다수결의 원칙을 내세워 과반을 득표한 대의제가 마치 민주주의처럼 보이듯. 그러나 대개의 회사는 지배주주 지위의 한 사람에게 의사결정 권한이 집중된다. (실상 대의 민주제 또한 주식회사와 다르지 않다. 민의를 대표한답시고 나선 대표자들이 나라를 말아 드시는 게 가능한 걸 보면 지배주주의 지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주주가 주인이라면 그 외 회사 조직에 몸담은 구성원은 거칠게 말해 마름이자 노예다. 모두 주주의 권한을 위임받은 자들이 하는 임파워먼트 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전체주의란 무엇인가, 복잡한 정의를 줄여 말하면, 전체가 개인보다 앞선다는 주의주장이다. 개별 조직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회사라는 집단은 인정하든 하지 않든 ‘노예적 도덕’이 팽배한 ‘자기왜소화’된 개인이 모인 곳이다. 맹수가 아닌 가축이 되어 안전을 확보하고 삶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유배시킨 개인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을 전체주의 나팔 아래 걷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회사는 민주적인 절차로 보이는 일련의 프로세스로 전체주의 시현 示顯이 가능해진다.
월급쟁이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주주(또는 주주의 경영대리인)는 자신에게 월급을 주는 세상의 처음이자 끝이다. 신성불가침의 이 권한은 위임이라는 규정의 틀 안에서 캐스케이드 되어 아래로 떨어진다. 회사 밖은 엄연한 윤리와 관습적 도덕이 존재하지만, 회사 안에선 직속 상사가 윤리고 도덕이다. 부정과 비위, 배임이 난무하더라도 제어가 어려운 이유다. 조심스럽지만, 이런 회사에서 묵묵히 일한다는 건 비윤리적 행위로 간주되는 의제자백이다. ‘모든 사람 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시키니까 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트랩에 걸려든 우리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욕할 수 없다.
정부, 대기업, 사법기관도 다르지 않다. 이들이 저지르는 기상천외한 비위 사실들은 모두 위와 같은 구조 안에서 자행된다. ‘전체주의 정부의 본질과 모든 관료제의 본질이 기능인들과 단순한 톱니바퀴의 이들을, 비인간화하도록 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 누구도 통치하지 않는 통치 (the rule of nobody)’ 속에서 개인은 사라진다. 튀는 것은 싫어하면서도 개성과 변화를 요구하는 이율배반의 현장이 우리네 직장임을 생각하면 민주주의에 가려진 전체주의임이 확실해 보인다.
회사, 기업에 의한 개인의 종말은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이다. 철학자 강유원은 말한다.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가 농약이라면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는 생물학적 오염과 같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우리를 얼마나 노예화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기업에 취직하여 자신도 모르게 기업의 전체주의 지배를 돕고 있으나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의 목숨을 겨누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빤히 알면서도 어쩌질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 파시즘’의 본질적 내용이요, 그것을 우리는 패스트푸드 전체주의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전체주의 회색인간으로 살기 위해 나는 태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월급쟁이라는 환경은 주어진 것이니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가장자리에서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하는 삶의 의미까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니, 빌어먹을 욕지거리들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상은 고되고 고되다. 회사에 대고 욕지거리 하지 마라는 말 대신에 욕을 입에 달지 않고선 멀쩡하게 살 수 없는 세상에 분개해야 옳다. 갈수록 드는 생각은 중세 봉건귀족의 봉토에서 밭일 해주며 벌어먹던 농노와 회사에서 엑셀과 PPT를 두드리며 일해 벌어먹는 월급쟁이가 다르지 않다는 것. 봉건 귀족의 마름 같은 상무님이 지나가며 말씀하신다. ‘거, 있잖아. 내 말한 거, 그거 내일까지 좀 해 놓지’. 인류는 진보했다고 하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