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과 월급쟁이
근대 미국의 자유주의 정치사상을 잉태했던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은 1823년 17세의 나이로 동인도회사에 입사하여 1858년 퇴사하기까지 무려 35년간 직장생활을 했던 월급쟁이 고조 할배쯤 되는 사람이다. 존 로크에서 사유재산이 탄생했다면 밀에서 이른바 현대적 개념의 ‘개인’이 탄생한다.
“설령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가 주장한 사상의 자유는 철저하게 개인을 옹호하고 있는데
“자유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우리가 타인에게 행복할 뺏으려 하지 않는 한 또는 타인이 행복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다.”
라고 말하는 ‘자유론 On Liberty’에서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는 욜로 yolo(you only live once), 소확행(작지만 진정한 행복) 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현대적 트렌드를 대략 200년 정도 앞서 있었던 근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또 강조하기를 자신에게 질문하지 않는 사람, 즉 자신의 기준이 외부로 향해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며 ‘인간적 성능도 시들어’ 버리리라고 저주한다. 노예적 삶으로 전락하게 될 월급쟁이들을 위협하며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감시의 눈총을 받으며 살므로 다음과 같이 묻지 않는다. 즉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이 나의 성격과 성향에 맞는가? 또는 무엇이 내 속에 있는 최고 최선의 것으로 하여금 그 힘을 발휘하게 하여 그것을 성장 발달하게 하는 것일까? 반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자문한다. 무엇이 나의 지위에 적합한가? 나와 같은 신분으로 같은 수입을 얻는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또 나보다 높은 신분과 재산을 갖는 사람들이 보통 어떤 일을 하는가? 그들은 관습에 따르는 것 외에 아무런 기호를 갖지 못한다. 그 결과 정신 자체가 기꺼이 구속 받게 된다. 심지어 사람들은 오락에서도 무엇보다도 관습에 맞추는 것을 중시한다. 즉 그들의 기호는 집단적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들 속에서만 선택한다. 특이한 취미나 변칙적인 행동은 범죄와 마찬가지로 회피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들의 본성에 따르지 않은 결과 그들에게는 그들이 따라야 할 어떤 본성도 없게 된다. 그들의 여러 인간적 성능도 시들어 죽어버린다. 그들은 이미 어떤 강렬한 욕망도 본래의 쾌락도 누릴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것인 의견이나 감정을 갖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과연 인간 본성에 적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자유론 (John Stuart Mill 지음, 박홍규 옮김, 문예출판사) 중에서 인용함
자유라는 단어의 ‘유’ 由는 ‘말미암다’는 의미가 있다. 말미암는다는 사전적으로 ‘어떤 현상이나 사물 따위의 원인이나 이유’가 된다는 의미다. 자유는 말 그대로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스스로 정한 이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자유다. 인간은 조건에 가두어져 있으므로 자유라는 주제는 오랫동안 인간의 심미적인 감정을 건드려 왔다. 자유를 위해 목숨도 바치고 위험에 기꺼이 빠지지만 우리는 자유라는 것에 대해 정색하고 대면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자유, 자유란 무엇인가? 19세기 한 월급쟁이는 기꺼이 자유란 무엇인가에 관해 묻고 답하는 데 일생을 바쳤고 그의 고민으로 완성된 저작은 지구 최고 강대국인 미국을 낳았다. 사유의 힘은 이러하다.
도열 된 책상들의 끝자리에 그(녀)는 앉아 있다. 가장 많이 쌓인 연차의 상징이지만, 마지막 끝으로 밀린 자리, 눈을 떴다 감았더니 어느새 오도 가도 못하는 자리에 다다랐다. 밀릴 데까지 밀리면 당도하는 자리에 그(녀)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편안한 자리다. 칸막이 벽면엔 ‘뒤로 물러서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상투적 문장을 포스트잇에 써 놓았다. 압정 밑에 종잇조각이 간당간당 물려있다. 안정되고 편안한 이 끝자리의 광경에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보인다. 월급쟁이 불확실성의 실체는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이다. 그 불안 때문에 회사에서 시킨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단지 더 오래 회사를 다니며 안정된 삶을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자아내는 복종이다. 불안에 떠는 사람은 눈에 띄기 마련이다. 집단의 눈은 이런 마음을 가진 자를 단박에 알아본다. 잘리지 않기 위해 무리 (성과 강박에 따른 악의적 인간관계, 잦은 야근 같은)해야 했고 무리해서 일했으므로 삶이 망가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은 월급쟁이에게 말한다. 먼저 자기 생각을 가져라. 남의 사유가 아니라 자신의 사유와 감정을 예민하게 스캔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자유의 시작이라 주장한다. 월급쟁이는 삶의 모든 결정에서 차선을 선택해 온 자들이라 정의 내릴 수 있다면 밀의 말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다. 월급쟁이는 자신에게 이런 수동성이 있었나 하며 놀라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불안하다. 자신의 선택을 겁내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을 믿지 못하는 불안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옮아간다. 확언하건대 미시 물리계 양자역학의 대가들도 월급쟁이 불확실성은 영원히 풀지 못한다. 그것은 누구도 짊어질 수 없는, 세상 가장 복잡한 불안이다. 이 불안에 관한 존 스튜어트 밀의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한 줄로 요약해본다. ‘그 불안은 무사유로부터의 해방, ‘자유’로 한 걸음 내딛기 전에는 이 세상 누구도 풀 수 없는 숙제지만, 세상이 정한 모든 ‘가치표’를 뒤집고 자신이 세운 생각으로 다시 바꾸어 만들 때 ‘툭’하고 풀려버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