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 성대모사)
짜라투스트라가 내 일터에 걸어 들어온다면
(짜라투스트라 성대모사)
그대가 하루의 반을 여기 앉아 하는 일이라는 게 오로지 무언가를 팔기 위해서인가? 그것이 많이 팔린다는 건 그대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대의 전 생애를 걸쳐 이룬 노력들이 단지 물건과 서비스를 많이 팔기 위한 필사적 헌신이었나? 그 시간이 지난 뒤 당신은 무엇이 되어 있는가? 여전히 삶은 고달픈 노동으로 보는가? 고달픈 노동을 사랑하며 빠르고, 바쁘고, 새로운 것들을 선망하는 그대의 근면함은 도피이자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다. 나는 그대가 종말의 인간이 아니길 바란다. 독창성 없는 교양만을 지닌 채 현실에 만족하는 자들 말이다. 그들은 ‘우리는 행복을 발명해 냈다’며 눈을 깜빡이지 않았는가. 끝내 모욕의 삶을 끊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대에게도 위대한 길은 아직 남아 있다. 무릎을 꿇고 마음껏 짐을 싣게 두는 낙타처럼 모욕을 잘 견디는 인간은 그대와 어울리지 않는다. 형제여, 사자와 같이 스스로 명령하는 인간이 되어라. 사는 법은 죽는 법에 달려 있다. 그대는 먼저 재가 되지 않고서는 다시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선 안 된다. 지금 거부하지 않으면 오늘 모욕의 삶은 영원회귀 하노니, 그대가 오늘 지금, 시간을 들여 치장한 PPT 보고서는 일만 년 뒤에도 여전히 그대는 작성하고 있을 것이고 처지를 한탄하면 입에 물었던 담배도 일만 년 뒤에 똑같이 물고 있을 터. 지금 No라고 말하지 않으면 치욕의 삶은 영원히 반복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영원회귀의 어두운 면이다. 지금 너는 온갖 너저분한 짐을 싣고 뒤뚱거리는 낙타다. 짐을 벗어 던져라. 그리하여 지금 얻어진 자유로 일만 년 뒤에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네 스스로의 명령 속에 삶의 모험은 준비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스스로 명령을 내려라. 그대 삶을 믿어보라.
성대를 고쳐 나로 돌아온다. 근래 니체를 읽어 내 삶은 한층 위험해졌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나는 사회가 들씌운 온갖 페르소나로 덮여 있었다. 알기 전에는 그럭저럭 살 수 있었으나 알게 된 이후 그것들과 공생하긴 힘들어졌다. 그것들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시도로 늘 싸우는 중이다. 메스를 깊게 들이대면 페르소나와 내가 한데 엉겨있어 그것을 때어내느라 아프지만 니체는 견디라고 고함친다. 고작 그것조차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라 욕한다. 그가 언젠가 자문했던 ‘그대는 그대를 견딜 수 있는가?’는 실로 무서운 말이었으니 삶의 구체적인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면을 하나씩 벗겨나가면 언젠가 나는 내 자신을 대면하리라 믿는다. 시간을 벌기로 한다. 그러나 질문은 잊지 않는다. 언젠가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이다. 서서히, 신중하게, 부드럽게, 하지만 가차 없이! 우선 월급쟁이, 이 너저분한 모욕의 삶부터 정리하고 까발리고 벗겨내는 것이 순서라 믿는다.
분명한 건 월급쟁이는 스스로 현명하다 자부하지만 인생에 있어선 문외한이라는 점이다. 짜라투스트라가 설파한 ‘현자顯者’의 전형이다. 똑똑한 채 하지만 행동하지 않는 자들. 월급쟁이는 아무리 그 단어를 찬양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현자’에 지나지 않는다. 물건과 서비스를 조금이라도 더 팔려고 안달 나기를 강요 받은 사람들이요, 바른 길은 애초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길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월급쟁이의 삶은 가엾다. 삼공의 벼슬도 알고 보면 종놈 한 가지라는데 그 길에 삶을 걸고 사투를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에서 방점이 찍히는 건 언제나 ‘만인지상’이지만 만인지상이라도 일인지하라면 그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지만 종국엔 내 삶이 부정되고 부끄러워지는 사태만큼은 막고 싶은 것이다. 짜라투스트라가 내 일터로 와서 나를 한대 쥐어박고 가면 정신 차리려나.
사족)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제목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음악이 있다. 책의 첫 장면인 차라투스트라가 깨달음을 얻고 난 뒤 하산할 때의 장대한 영광을 웅장하게 연주한다. 책 마지막을 조용히 덮으며 듣고 있노라면 방안 가득 퍼지는 광배의 빛을 경험할 수 있다. 마에스트로,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말문을 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