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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May 19. 2020

월급쟁이와 가난

월급쟁이와 가난



어제까지, 남방 팔꿈치 부분이 해진 줄 모르고 다녔다. 곧 큰 구멍이 날 기세였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팔을 흔들며 다녔다. 직장 동료들에겐 팔을 올려가며 인사했고 커피를 들고 마실 때마다 팔꿈치가 구부러지며 아슬아슬하게 피부가 보였다 말았다 했을 테다. 아무려면 어떤가, 아무 일 없는 듯 넘어가면 될 일이지만,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모르면 몰랐겠지만, 알고 난 다음 왠지 칠칠치 못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영 마음이 편칠 않다. 누군가는 눈치채지 못했을 테고 또 누군가는 나를 꽤나 어지간한 사람이라 여겼을 테고 더러는 안타깝게 봤을 터.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 해진 남방에 나는 왜 부끄러울까 싶은 것이다. 해진 옷을 입은 사람을 사람들은 왜 안타까워하는가, 궁핍과 가난은 왜 측은한가, 가난한 사람 취급받는 건 왜 기분 나쁠까? 굳이 기분 나쁠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가난은 인간의 발명품이다. 인간이 차곡차곡 쌓아온 근대적 욕망이 그 발명을 도왔다. 싸구려 옷의 해진 팔꿈치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그것은 가난이다. 구두 앞굽은 뭉텅해지고 마모된 뒷굽이 신경 쓰이면 그건 가난이다. 그것이 신경 쓰이게 만드는 사회에서 가난은 비로소 작동된다. 허름한 옷차림을 얕보는 사회에서 가난은 출발한다. 아무리 궁핍해도 궁핍함이 신경 쓰이지 않으면 그것은 가난이 아니다. 확장해 보면 가진 게 있고 없고, 신분의 고하를 떠나, 남녀를 떠나, 있는 그대로의 사람 자체를 보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때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건 어린아이의 시선이라 말한 바 있다. 주인과 노예라는 게 무엇인가, 왜 가진 자가 있고 가지지 못한 자가 있는가, 모든 땅과 건물엔 그 주인이 있다는 걸 믿지 않는 시선 말이다. 


동물은 굶어 죽지만, 결코 가난해지진 않는다. 인간은 가난을 신경 쓰고 자책하여 스스로 죽을 수도,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먹을 게 없어 배고프지만 한 조각 빵에도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가난하지 않다. 더 많은 월급에 이리저리 전전하며 더 벌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더라도 머릿속에 콕 박힌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오로지 조금이라도 월급 더 주는 회사가 있다면 여지없이 옮겨가며 자신의 삶을 돈 속으로 구겨 넣는 사람은 가난도 함께 따라다닌다. 돈벌이만 된다면 어디든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경박한 궁핍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돈을 잡고 있으면 돈에 잡힌다. ‘적게 소유하는 자는 그만큼 남에게 덜 소유 당’하지만 많이 소유하고도 남에게 온전히 소유 당한 자는 자신의 소유를 끊임없이 스스로 폄하할 수밖에 없다. 해진 옷에 영원히 당당할 수 없다. 


직장생활을 하며 ‘아무개를 상사로 모셨고, 누구를 모시네 마네’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들을 때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뿌리 깊은 노예성에 안타까워하지만, 이런 월급쟁이는 그가 비록 고소득을 구가하는 고위직이라도 ‘절대가난’은 벗어날 수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그래서 가난은 복종과 굴욕 그리고 부자유와 닿아 있다. 돈의 시혜에 과감하게 자신의 자유를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은 가난하다. 노예의 가난은 궁핍한 빈곤이 그를 가난하게 하는 게 아니라 시키는 일만 하는 복종에 자신의 삶을 모두 갈아 넣는 부자유가 가난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노예와 월급쟁이의 부지런함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적극적 외면이다. 복종에서 오는 일종의 안온함을 부지런함으로 지키려는 의지다. 이때의 부지런함은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다. 결정의 피곤함, 자유의 위험을 애초에 모면하려는 비겁한 은신 같은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래서 이러한 삶의 위험에 맞서 싸우는 개인의 강인함을 강조하며 힘들고 드물지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것이 유일한 도덕이라 칭송했는지 모른다. 


지난날, 허름했던 집, 남편을 기다리며 말이 통하지 않는 더러운 시장에 가 반찬거리를 샀고 저녁을 지었던 아내의 모습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남편이 벌어오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이리 아끼고 저리 아끼다 조그만 손해라도 보게 되면 원통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던 아내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나는 가난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돈을 쫓아 내 삶을 송두리째 욱여넣어 부를 획득했더라도 그것은 또 하나의 가난임을 안다. 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반대로 아무리 재산이 없더라도 돈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면 재산이 많건 적건 그는 가난하다 말할 수 있다. 해진 남방이 신경 쓰이지 않는 순간, 지금보다 많은 월급이지만 하기 싫은 일을 과감히 거부하는 순간, 또 하나의 작은 자유를 되찾게 된다. 세상을 이기는 연습이다. 알지 않는가, 작은 성공의 누적이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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