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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용 May 12. 2020

월급쟁이의 스승

월급쟁이의 스승

어느 날 수많은 군중이 석가의 말을 들으려 모여 앉았다. 오래 기다린 끝에 드디어 석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군중 앞에 선 석가는 아무 말 없이 꽃을 들어 보인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석가가 말하려는 게 뭘까, 저 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느닷없이 꽃을 들어 보인 깨달은 자의 의중을 파악하려 모든 사람들이 여념 없던 그때, 가섭은 조용히 일어나 미소 짓는다. 석가는 가섭을 보고 천천히 말했다. “가섭이 깨달았다”. 저 유명한 염화시중 拈華示衆의 미소다. 가섭은 사람들이 우러르는 부처를 보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보고 미소 지었다. 모든 사람들이 부처의 의도를 읽어 내내리 할 때 가섭은 지축을 울리는 부처의 모습보다 꽃이 아름다워 넋을 놓고 미소 지었던 것이다. 부처라는 큰 벽을 넘어섰다는 의미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넘어서야 한다. 내가 월급쟁이에 목을 매고 달려드는 이유는 월급쟁이를 넘고 싶어서다. 어쩌다 보니 내 앞에 가장 큰 벽이 되었고 그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삶의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어서다. 월급쟁이를 죽이는 방법은 월급쟁이 정체성을 갈아 입는 것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삶의 노예성을 끝까지 파고 들어 찾아내고 그것들을 모두 드러내 대나무를 깨듯 가차없이 부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 헤맸는지 모른다. 나는 그 중에 월급쟁이를 가장 극적으로 뛰어넘은 한 사람을 알고 있다. 내 스승에 관해 말하려 한다. 


한 시인이 있었다. 나는 지독하게 평범했는데 그 시인은 나에게 너의 평범이 위대함으로 가는 길이라 늘 말했다. 나는 믿지 않았으나 돌이켜보니 그 말은 무섭고 아름다운 주술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나는 천둥벌거숭이였는데 시인은 나에게 북극성으로 향하는 떨리는 나침반 하나를 툭 던졌다. 시인도 오랫동안 너저분한 월급쟁이의 삶을 살았는데 내게 던져준 나침반은 그가 쓰던 그것이었다. 그가 월급쟁이를 뛰어넘었던 방법을 알려줬던 것이다. 지저분한 삶을 헤어나오지 못하던 나는 냉큼 그 나침반을 받아 들고 삶의 지도를 정치하고 자북磁北을 맞추었다. 내 안에 조금 특별한 하나를 스스로 끄집어 내어설랑은. 아, 시인아 어디 있는가. 스승은 끝내 시인이 되었다. 


나는 스승이 좋아했던 제자는 아니었다. 분명 그랬을 테다. 그가 그토록 제자들로부터 기다리던 천진한 질문 하나 하지 못했고 살갑게 다가서지도 못했다. 살갑기는커녕 인사치레라도 제대로 한 적이 있었다면 이토록 그립진 않았을 테다. 그의 제자라면 한번쯤은 몰려가 본 적 있을 스승의 가택도 가보지 않았고 자연스레 깊게 나눈 대화의 기억이 없다. 식사할 때 그의 면전에 앉기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졸렬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스승에겐 나는 별 볼 일 없는 제자 중에 한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나에게 스승은 그의 작은 흉터마저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초라한 시민성에 남지 않게 했다. 월급쟁이 사다리 끝이 무엇인지 볼 수 있게 했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미친 삶의 대열에서 탈주하게 했다. 여전히 월급쟁이 째째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잘 살고 있는 것이냐’를 늘 묻는다. 어쭙잖은 middle class value는 개에게 던져 준지 오래고 이제껏 이룬 게 어디냐며 차지한 자리 뺏기지 않으려 안절부절 않는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혹시라도 있다면 지금의 지위나 안위를 더 이상 애지중지 하지 않는다. 내 삶을 실험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실험은 실패가 반이 될 테고 성공하더라도 듣보잡 필부(匹夫)의 삶을 세상은 알아주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런들 어떠랴, 깨지고 낙담했다가 다시 희망하고 떠난다. 스승이 가르쳤고 나는 배웠다. 


그가 내 삶에 등장한 건 순전히 우연에 기대어 있다. 그 우연을 설명할 도리는 없다. 언젠가 이 말을 넌지시 지나가며 했을 때 스승은 버려질 그 말을 다시 주워 담아 정색하며 나에게 일렀다. ‘준비된 자, 간절한 자가 스승을 만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랬다. 월급쟁이 그 지난한 인생이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작가가 되고 삶의 터전을 마음대로 떠나는 걸 보면 모든 것은 그리 되려 정해진 만남이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세상은 위험하다고 했지만 스승은 바로 그 길이 네가 유일함으로 가는 길이라 말했다. 캬, 간지 폭발이다. 


내 나이 마흔을 넘긴지 오래다. 오래 전 스승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던 때와 얼추 같은 나이가 됐다. 이 사실에 나는 몸 속 깊은 곳까지 동요했었다. 그를 뛰어넘으리라. 스승과 대자 구도를 이어가려는 게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을 따져 묻고 연구적 대상으로 삼겠다는 게 아니라, 나는 그의 삶이 극적으로 전환됐던 그 시점의 에너지를 넘어서고 싶었다. 자유로운 결정으로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삶의 충일함을 끝까지 밀어 부치는 욕심을 부려보고 싶다. 그런 중에 스승은 친구이자, 연인이고 또 도반이 됐다. 깊이 그리고 또 깊이 내 내면의 오지를 탐험할 때 동행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와도 같은. 그 길을 함께 걸으며 스승에게 안내 받고 그러다 따라하고, 모방하며 닮아가고, 닮아가며 끝내 넘어서려 한다. 


이 글을 끝내려니 내 눈앞에 갑자기 멋진 수염을 기르고 얼굴 무너지도록 웃는 시인이 나타난다. 항상 그의 오래 된 책상에 앉아 무엇을 쓰거나 읽는 한 시인. 스승은 시인이었고 마지막 그의 삶은 시였다. 그 해 봄, 병색 짙은 스승의 초췌한 모습에 눈물 보이는 우리에게 춤을 추라 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힘을 내어 눈으로 말했다. ‘이것이 시와 같은 삶이다.’ 행간의 도약과 함축, 복선과 반전이 있는 시와 같은 삶 말이다. 모레, 스승의 날엔 실로 아주 오랜만에 그와 마주해야겠다. 요새 비대면 만남이 유행인 건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간지나는 그 목소리, 성대모사라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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