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적인 너무도 회사적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에서 니체는 인간 내면의 야만성을 철저하게 밝혀냄으로써 인간너머를 모색한다. 인간은 결코 인간적일 수 없다는 역설의 진위를 철학자의 예리한 눈으로 바닥까지 파헤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를 스스로 참혹하게 반성한다.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야만을 저질렀고 그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짓도 해야만 했던 인간에게 인간적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묻게 된다. 인간은 어떻게 다시 인간적일 수 있는가?
독일 사상가 테오도르 아드르노는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직후 ‘인간은 이제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이어서 그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시를 쓸 수밖에 없을 것’이라 말한다. 동물적 야만성이 지배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그것을 극복할 능력 또한 인간은 가지고 있어서 ‘인간 너머’ 생각할 수 있는 주체 또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겠다. 그는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 가는 허약한 세상을 멈추게 하는 약사여래 같은 일말의 처방을 우리 인간에게서 기대하는 것이다. 과연 인간은 수많은 야만의 힘 앞에서 사랑과 자유의 힘으로 버티며 도도히 흐르는 역사를 만들어 왔다.
유사이래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크고 작은 집단은 야만을 품고 있다. 좁히고 좁혀 내 안에 야만이 서식하고 있으므로 우리 안에 그것은 없을 리가 없는 것이다. 회사인간은 다르지 않다. 회사 안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야만성을 우리는 늘 목도한다. 인간의 감정과 감각까지 자본화시켜 씹어 삼키려는 자본의 야만성은 물론 열정, 명예까지 승부욕으로 바꾸어 열등과 우등의 인간을 만들어 낸다. 돈으로 모든 것을 맞바꿀 수 있다는 저급한 물욕을 자극해 인간과 돈의 선후를 흔들어 놓는다. 고등교육을 받고 석사, 박사까지 배운 자들이 ‘얼마나 더 많이 팔까’를 고민하며 생을 바치는 곳이다. 회사적 인간 각자의 야만이 모이면 제곱이 된다. 자칫 야만에 빨려들 유혹을 매일 견디며 살 수밖에 없는 게 월급쟁이 인생이다. 어느새 회사적인 너무도 회사적인 인간이 되고야 말았다. 우리는 월급쟁이 너머를 생각할 수 있는가.
월급쟁이가 자유를 선택하면 먹고 사는 생활에 치명적인 대가를 치뤄야 한다. 내 생사여탈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그것을 쥐고 있는 자와 공생하기 위해 기꺼이 내 시간과 몸을 거기에 갈아 넣어야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사이에서 자유란, 옛 이야기처럼 영웅적 서사를 가진 자들만이 누렸던 꿈에 불과한, 잡히지 않는 것이 돼버렸다.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불안과 우울이 생활을 지배한다. 월급쟁이들은 익명으로 쪼그라들고 잗다란 자유를 표방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간다. 그들이 숨은 곳, SNS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거라곤 행복해 보이려는 안간힘뿐이다. 이런 때 ‘소확행’이라는 건 생활 깊숙이 팽배한 불안의 위장 같은 것, 그것은 일종의 불행의 포르노다. ‘좋아요’를 누르는 대신 위로와 연민을 꾹 눌러 보내야 할 판인가. 회사 말고, 그런 거 말고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건 없는 건가.
우리는 회사적이다. 회사너머로 나아가지 않는다. 월급쟁이는 월급 주는 사장이 원하는 삶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가진 돈만큼만 꿈꾼다. 가진 돈이 적으면 꿈도 작아지고 가진 돈이 없으면 꿈은 없어진다. 가진 것 없이 꿈 꾸는 자들은 좌충우돌 허우적대다 결국 현실의 높은 벽만 확인하고 자지러진다. 세상은 월급 받는 딱 그만큼의 꿈만 내준다. 돈이 인간보다 소중한 집단에서 온종일 지지고 볶는 사람들이 월급쟁이다. 꿈을 돈 위에 세우지 못하면 월급쟁이 못 면한다. 백화점에 어슬렁거리면 왕이 된다. 깍듯한 90도 인사를 받는다. 나에게 인사하는 게 아니라 내 돈의 교환 가능성을 보고 인사한다. 백화점에서만큼은 왕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사고 또 산다. 소비함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난리 통에 명품관이 미어터진다는 뉴스가 오르내린다. 소비가 존재의 이유인 삶을 어떻게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회사적 인간은 이렇게 후퇴한다. 돈의 한계에 자기 이상과 삶을 등가화 시키는 우리는 너무도 회사적이다.
사람이 꿈을 꾸면 현실은 극복의 대상으로 바뀐다.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상주의자만이 현실주의자’가 된다. 내가 진짜 그걸 할 수 있을까, ‘그것’과 ‘지금’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까 고민하게 되면 그제야 내가 극복해야 할 현실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월급쟁이가 꿈을 꾸면 월급쟁이 정체성이 비로소 보인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회사로부터 얻어야 할 휴가, 수많은 설득, 눈칫밥, 당해야 할 굴욕 같은 크고 작은 억압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는 것이 비로소 보인다. 현실주의자가 현실을 바로 보는 게 아니라 꿈을 가진 사람만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꿈은 무서운 것이다. 꿈은 위험한 것이다. 함부로 꿈을 꾸라고 이야기 해선 안 되지마는 그러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 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