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재용 Aug 05. 2020

몸 가진 것들이 사는 법

몸으로 하는 공부

몸 가진 것들이 사는 법

가끔 그저 울고 싶을 때가 있다. 해가 지는 하늘, 구름은 흘레붙는 개 모습으로 퍼지고 갑자기 나는 아, 죽고 싶지 않다고 나지막이 돼 내일 때, 아들의 허벅지가 나보다 단단해져 갈 때, 딸이 문득 나보다 사리 분별이 뛰어나다 생각될 때, 집 없는 개가 달려와 내 다리를 물 때, 개에게 물린 아픔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내가 한심해질 때, 개가 나를 물때 아이와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짐짓 받아들일 때, 슬퍼서 울고 싶은 게 아니라, 슬프지도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지만, 삶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다는 몸 가진 자로서의 이런 자각들이 아바타 주인공이 커다란 새와 꼬리로 접속하듯 훅하고 들어와 속수무책으로 주책없이 눈가를 적시는 것이다.


그것은 떠오르는 해가 지나온 자신의 궤적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삶이 삶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판단력과 빛나는 정언명령들이 닿지 않는 곳이다. 그것들이 닿지 않는 곳에 몸이 있다. 몸은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처럼 사는 건, 삶을 관통하는 자세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에 있는지 모른다. 무릎을 치게 되는 건 그렇다, 머리로는 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머리가 몸을 지배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머리는 기억해야 할 테다. 아버지 정충에 지나지 않았을 때, 오직 박동 소리만 내며 내 어머니 살을 빨아먹을 때, 그때 무용했던 그 머리를. 그렇다고 지금은 유용한가, 아니다. 교만하게 내 몸을 지배하려 드는 머리는 지금 지나는 내 삶이 내 삶인지, 너의 삶인지도 모르고 오로지 처세의 방정식만 풀려 든다. 삶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는 것은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느끼지 못한다. 무엇이 되건 상관하지 않고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해결해 나가려는 의지는 실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내가 자주 다니는 산책길 옆에 조그만 식당이 숲 가운데 있는데 언제부턴가 못 보던 개가 짖어대기 시작했다. 주인도 모르는 들개였고 나를 향해 짖어도 몇 번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그 길을 지나려던 때, 그날은 다른 날과 달리 유난히 그 개가 겁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달이 났다. 오른쪽 장딴지를 물렸고 같이 걷던 아내는 웃었지만 나는 호들갑을 떨었다. 개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내 몸을 정확하게 알아봤다. 내 몸은 개의 저의를 머리가 알기 전에 또 알아봤다. 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알 수 없다. 산책로의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다. 아내는 갈림길에서 어떤 길로 갈지 물었고 나는 개의 길로 가자고 말했다.


몸과 몸끼리는 머리가 모르는 것까지 안다. 개의 몸과 내 몸은 적의와 공포를 동시에 알았다. 그 느낌과 감정을 머리는 따라가지 못한다. 배꼽을 가진 인간과 더듬이가 있는 벌레와 긴 수염이 자란 고양이는 몸을 가졌던 것이다. 세상은 머리로 살아라 하지만 머리로 살아선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내 종족의 나이가 나이며 전 인류의 나이테가 내 몸에 박혀 있는데 그 나이테의 다른 이름이 나의 몸인데 그것들을 버리고 머리만 따를 수는 없다. 일찍이 몸이 하는 철학, 개같이 살고자 했던 디오게네스와 견유주의 철학자들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간파했던 듯하다. 개와 같이 살게 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천박하고 낮은 것 현실의 더러움을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몸과 관련된 이 세계의 비밀을 풀어내는 성스러운 작업이었던 것 같다. 이 시대의 광기가 다른 시대의 상식이었던 것처럼 성스러운(聖) 것과 속(俗)된 것, 진짜(眞)와 환상(幻)은 모두 가상이 되고 머리의 그것은 언제든 뒤 바뀔 수 있는 것이어서 세계의 진짜를 갈구하고 찾아내기 위해선 몸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철학적 구원의 방편이었을 터. 


개소리를 하는 이유, 그 개와 나 사이의 쓰잘때기 없는 잡소리를 무모한 단언들로 이어가는 이유는 지나고 보니 삶은 몸으로 견딘 것 같다는 희미한 ‘찐’ 같은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몸으로 견뎠을 뿐만 아니라 몸으로 버티고 몸으로 때운 진실 같다. 몸의 길은 덤도 에누리도 없어서 맨살로 철조망을 통과한 사람의 등판 같은 것이다. 견유주의犬儒主義 흉내를 내보려는 잗다란 시도다. 온갖 철학자를 ‘까는’ 니체도 견유주의 철학자들에겐 존경과 찬사를 보낸 것을 보면 그 또한 몸의 철학자인 것을,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그의 말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월급쟁이는 사소하고 중요한 것을 가리고 우선순위를 정해서 촌각을 다투며 일을 처리해 나가는 사람들인데 문득 그것들이 중요할까 싶을 때 나는 머리로만 살고 있구나 하며 장탄식을 하게 된다. 복잡할 것 없이 나라는 실존에서부터 시작해야 옳겠다. 아, 몸으로 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해가 가고 나이를 먹을수록 논리와 로고스에 빠지는 것보다 내 몸의 감정과 에토스에 천착하는 것이 손아귀 잡아 쥔 모래 한 알이라도 건지는 일임을 알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