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재용 Jul 28. 2020

월급쟁이 알바트로스

보들레르와 스피노자, 그리고 장주

월급쟁이 알바트로스

(보들레르와 스피노자, 그리고 장주)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그 날개가 문제다. 신천옹으로 불리는 알바트로스는 가장 활공을 잘하는 조류 중 하나다. 3m에 이르는 날개로 바람 부는 날에는 날갯짓을 않고도 수 시간 동안 떠 있다. 한 번에 5,000km(서울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북부까지의 거리)를 날아간다. 아름다운 지구의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비행하며 대륙을 건넌다. 그런데 그 긴 날개 때문에 땅에 내려오면 제대로 걷지를 못한다. ‘지나치게 큰 날개 때문에 뒤뚱거리고 넘어지기 일쑤다. 절벽이나 높은 산처럼 상승기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면 스스로 힘으로 날아오르기도 쉽지 않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는 그의 유일한 시집, ‘악의 꽃’(Les Fleurs du mal)에서 자신을 알바트로스에 비유한다. 자유롭게 새파란 창공을 날 수 있게 하는 큰 날개는 세상을 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높은 인간적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는 세상에 농락당하고 넘어지는 알바트로스에 자신을 투사한다. 세상은 자유로운 인간을 위험에 빠트린다. 


신천옹 -보들레르-


흔히 재미 삼아 뱃사람들은

커다란 바닷새신천옹을 잡는다

태평스런 여행의  동반자는

길은 바다 위로 미끄러지는 배를 따른다


일단 갑판 위에 내려놓으면

 창공의 왕들은 어색하고 수줍어

가련하게도 크고   날개를 

노처럼 그들 옆구리에 끌리게 둔다


 날개 달린 나그네

얼마나 어설퍼 기가 죽었는가!

전엔 그처럼 아름답던 그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추한가

어떤 친구는 파이프로 부리를 건드려 약을 올리고

다른 친구들은창공을 날던  병신을 절름대며 흉내 낸다


시인도 구름의 왕자와 같아서

폭풍우를 다스리고 사수(射手) 비웃지만

야유 소리 들끓는 지상으로 추방되니

거대한  날개는

오히려 걷기에 거추장스러울 .


알바트로스는 자유로운 인간의 자기 투사다. 사회에 태어난 한 인간의 자유는 늘 무시당하고 제약당하며 억압된다. 인간이 관계 맺고 사는 사회에선 자유라는 게 실현될 리 없다. 자유로운 인간은 거대한 악에 빠진 사회를 비웃는다. 악의에 찬 현실에는 수천 년 세월에 걸쳐 뭉쳐진 억압적인 권위와 존경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것들을 배경으로 하는 상징들에 대해 우리는 거짓된 경의를 표한다. 그때 우리 영혼 속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금욕적인 화학작용이 인간의 자유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자유로운 인간이 이런 사회적 역린을 건드리면 낙인과 조롱이 따라다닐 뿐이다. 그러므로 시인, ‘금욕적 화학작용’이 침범하지 못하는 사람, 즉 자유로운 사람의 날개는 세상 살기엔 적합한 게 아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는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 개념을 선취하여 기술하고 있다. 


“정리 70) 무지한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자유로운 인간은 가능한 한 그들의 친절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주석: 나는 ‘가능하면’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무지한 사람들일지라도 역시 인간이며 급한 경우에는 최선의 인간적 도움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로부터 친절을 받아들이며 그들의 기호에 따라서 그들에게 감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친절을 피하는 데서도 우리가 그들을 경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또는 우리가 탐욕 때문에 보수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들의 미움을 피하려다가 그들을 분노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친절을 피할 때 이익과 명예를 고려해야만 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서광사 1990년본, p. 311) 


어쩌면 보들레르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알바트로스’를 착안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스피노자의 날카로움이 보들레르에 박혀 통렬한 시로 표현된 것 같다. ‘알바트로스’를 스피노자가 해제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피상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 흡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날 수 없는가? 혹시 우리에게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커다란 날개가 있어서 그 날개를 감추고 다니느라 세상 사는 게 힘들지도 모른다. 날개가 있다는 걸 알지만 어설프게라도 펴 보일라치면 그 날개로 살아갈 사나운 세상이 무서워 스스로 잘라버린 지도 모른다. 2천 5백 년 전 ‘장주’는 그대가 가진 날개를 펴 보이는 걸 무서워하지 마라 이른다. 


“북극 바다에 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鯤(곤)이라 하였다. 곤의 길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鵬(붕)이라 하는데 붕의 등도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붕이 남극 바다로 옮아 갈 적에는 물을 쳐서 삼천 리나 튀게 하고 빙빙 돌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나 올라가며 육 개월을 날아가서야 쉬게 된다고 하였다. 매미와 작은 새가 웃으며 말하였다. ‘우리는 펄쩍 날아 느릅나무 가지에 올라가 머문다.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 수도 있다. 무엇 때문에 9만 리나 높이 올라 남극까지 가는가?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동안 사는 자는 오래 사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아침 버섯은 아침과 저녁을 알지 못한다.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짧은 동안 사는 것들이다.” (장자, 내편, 소요유. 연암서가 2010년본 p. 36~39 요약)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와 스피노자의 자유로운 인간, 장주의 붕鵬 새는 정확하게 겹쳐진다.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조건 지어진 육체와 피와 살이 있는 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오랫동안 모든 시인과 철학자의 유일한 관심사는 자유였다. 알바트로스의 날개는 하늘에서는 마음껏 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지만, 지상에선 그 자유로 인해 살기 어렵다. 그러나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날개를 없애면 자유의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진다. 조건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 조건을 넘어서는 인간, 보들레르와 장자, 그리고 스피노자가 꿈꾼 인간이다. 나는 어떤 인간이고자 하는가? 


한번 바람을 타고 날게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시켜서 하는 일을 하게 된 사람은 매일을 구만리 장공長空을 날아다니는 환희로 살게 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비록 자각하지 못하는 월급쟁이 알바트로스지만 그래서 그럭저럭, 어렵지 않게 비난받지 않으며 세상 둥글둥글 살아가지만 큰 날개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지체 없이 날아오르리라. 대륙을 건너고 대양을 넘나들며 아주 높은 곳에서 아주 먼 곳까지 이마에 손을 얹고 보리라. 비록 비난과 조롱을 견디며 위험에 빠지더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