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 등정

by 이규선

기상청은 16일 새벽부터 오후 사이 전남 남부와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서 가끔 비가 오고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돌풍이 불면서 천둥·번개가 치겠다고 15일 예보했다.


이런 기상청 예보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리산 천왕봉 등산을 강행한 것은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이 없었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버킷리스트에 대해 얘기하다가 불현듯 생각난 것이 지리산 등산이었는데, 이유는 점점 나이가 들어 체력이 달리기 전에 한번 가봐야겠다는 날이 어제 금요일이었다.


그래서 몇 친구에게 동행을 제안했는데, 그곳은 1박 2일 혹은 2박 3일 일정으로 간다고 하면서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전 직장 동료들에게 얘기하니 그중 과거 파리지사장을 했던 Y가 대학시절 1박 2일 코스로 가서 무릎을 다쳐 수년간 고생했던 얘기를 꺼내며, 이참에 스트레스를 풀고자 시간을 내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주 만나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눴는데, 그는 체력 안배를 생각해 1박 2일 코스를 건의했지만, 나는 집을 떠나면 잠을 못 이루는 민감한 성격을 내세워 당일치기를 언급한 내 제안에 따라 등산계획을 잡았다.


그동안 나는 한라산, 설악산, 주왕산, 월출산, 감악산 그리고 국립공원인 북한산은 3번이나 올랐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지리산 천왕봉은 나의 자존감의 표현이고, 화룡점정이었다.


ROTC포병학교 시절 내무반 동기들과 군화를 신고 구례 화엄사에서 지리산 노고단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 젊은 혈기에 무리하여 이틀간 병원신세를 졌는데, 동행한 전북대 출신 동기는 간염이 발생해 군사교육일 수를 못 채워 왕 소위로 제대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후 그때의 추억을 못 잊어 수년 전에 아내와 노고단까지 버스여행을 했고, 언젠가 꼭 가리라 생각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다.


얼마 전부터 동국대 출신 ROTC 동기가 국내 100대 명산을 매주 등산한다는 소식을 밴드에서 접했는데, 최근에 25곳을 정복하여 그것이 나의 천왕봉 등산 자극제가 되었다.


며칠 전에 동생들을 만나 나의 버킷리스트로 등정 계획을 얘기하니 놀라는 눈치였고, 따뜻한 5월에 가능한 일정을 길게 잡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래서 나는 동행자 Y가 젊은 시절 고생했던 얘기가 떠올라 1박 2일로 바꿀까 생각했고, 날씨를 체크하니 비가 온다는 예보에 연기할까 고민도 하였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가겠냐는 생각으로 인터넷에 소개된 등정 기사를 검색하며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주말은 등산객들로 붐벼 선택한 금요일, 새벽 4시 30분에 Y를 만나야 하기에, 나는 밤 9시도 안되어 잠자리에 들었지만 소풍 가기 전날처럼 긴장이 되어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러다 보니 10분 일찍 출발해 그를 만났고, 새벽 공기를 마시며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하여 지리산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7시 55분이어서 애초 9시 버스를 타려던 계획을 바꿔, 다행히 순두류로 향하는 8시 첫차를 탈 수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승객이 되었고, 10분 정도 S자 커브를 돌며 올라가 경상남도 환경교육원(순두류)에 도착했다.


함께 탄 승객 30여 명 중에 20명은 지리산고등학교 3학년 남녀 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려고 극기훈련차 천왕봉 코스를 정했다고 하였다.


12시쯤 지리산에 비가 온다는 인터넷 기사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번에도 틀리겠지" 하는 심정으로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625 당시 빨치산이 우굴거렸던 계곡이 깊고 숲이 울창한 지리산을 얘기하며 경사진 언덕을 오르니 벌써 숨이 찼고, 잠시 쉬다가 내 등산화를 보니 고무 밑창이 떨어져 있었다.


아뿔싸! 이를 어쩌나!


그런데 조금 더 걸으니, 다른 등산화도 부식되어 밑창을 제거한 후에 예비로 가져온 양말을 등산화 위에 덧씌우고, 그위에 등산화 끈으로 단단히 동여매었다.


그때 남동생이 내가 정말로 지리산에 갔는지, 전국적으로 비가 오는데 그곳은 괜찮은지 안부전화가 왔는데, 차마 등산화 문제는 걱정할까 봐 꺼내지 않았다.


천왕봉 최단코스 기사대로 처음에는 평탄한 길이었으나, 20분도 안되어 높아지면서 체력이 저하되었고, 몇 차례 수십 개의 급경사 계단과 거칠고 미끄런 바위돌 능선을 지나 일명 개선문이라는 곳에 이르러서는 기진맥진했다.


우리는 지리산 고등학생들 선두 몇 명과 앞서니 뒤서니 하면서 올라갔고, 뒤쳐진 여학생들을 내려다보며 힘을 내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인 법계사 옆에 있는 로터리대피소에서 초콜릿과 영양떡 등 간식을 먹으며 체력을 보강했다.


지나가는 등산객은 마치 기브스를 한 듯한 나의 파란색 양말을 쳐다보았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지만 마지막 깔딱 고개인 수백 개의 계단에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순두류에서 출발한 지 4시간 20분 만에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천왕봉(1915mr)에서 내려다본 지리산은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정상에 우뚝 선 비석 문구처럼 웅장했지만, 아쉽게도 안개가 자욱해 그 크기를 실감할 수 없었다.


기상청 예보와는 달리 결국 비는 오지 않았지만, 세찬 바람과 영하의 날씨 때문에 정상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 8부 능선으로 내려와 점심을 했고, 따사로운 햇살은 우리의 정복을 축하해주는 듯했다.


오를 때 힘들어 15차례 정도 쉬었지만, 하산할 때는 임무를 완수하여 집에 돌아갈 생각에 그다지 피곤하지 않아 5번도 안되었다.


그렇지만, 마치 옆이 터진 구두를 신은 채 하산하는 것이라 스틱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바윗돌에 미끄러질까 봐 더욱 조심하니 무릎이 아팠고, 온몸이 쑤셨다.


시계를 보니, 하산하는 버스가 오후 4시에 있어 맞추느라 나중에는 뛰다시피 했는데, 발목을 접질리지 않고 무사히 순두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아침 8시 첫차처럼 우리는 마지막 승객이 되었고, 나의 발을 본 운전기사와 승객들은 난생처음 본다며 큰일 날뻔했다고 위로하였다.


만일 일기예보대로 비가 왔다면, 휴게소에서 김밥을 먹느라 5분 늦게 도착하여 한 시간 간격인 아침 첫차를 놓쳤다면, 그리고 밑창 빠진 등산화에 양말을 덧씌우라는 친구의 아이디어가 없었다면 아마 이번 천왕봉 정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막역한 친구들 대부분 간 적이 없는 천왕봉은 적어도 1박 2일 일정으로 올라가는데 무리하게 당일치기로 등정했고, 저질체력인 내가 제대로 잠도 못 잔 상태에서 4시간 가까이 운전한 후에, 더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불편한 몸으로 악조건을 물리치고 정복한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제 동행한 Y사장의 협조도 컸지만, 무모한 등반에도 아무런 사고 없이 등정한 것은 천우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집에 돌아와 땀으로 범벅된 몸을 씻은 후에, 카톡에 올라온 글을 보며 웃음 짓는다.


A)와~~!!! 저 등산화로 천왕봉을...

중간에 못 오르는 이들을 위해 가짜로 만들어 놓은 비석 아냐? ㅋㅋㅋ. 놀라워요!


B) 특전사 직업군인도 형보다 못할 것 같아! 체력과 정신력 거의 특급 수준!! 대단합니다.

전 국민 1% 수준!! 이규선 중위님! 추~웅~성!!

축하드립니다~~♡


C) 대단합니다. 정상 정복을 축하드립니다!


D) 체력은 국력. 참 대단합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다음은 히말라야. 축하해요!


E) 아~ 저 나이에 모두 뒷짐 지며 헛기침하면서 꼰대질 할 때 용기가 가상하네! 역시 회장님은 아무나 못하지.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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