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by 이규선


예년과 달리 올겨울은 비가 많이 오는 것 같다.


보슬비 오는 오늘 오래 묵은 친구들과 혜화역에서 만나 젊음의 거리인 대학로를 걸었고, 혜화동 성당을 지나 낙산공원 언덕을 오르며 한양도성길을 산보했다.


소위 서울의 몽마르트르 언덕이라고 부르는 낙산공원은 계절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른데, 오늘같이 비나 눈이 오는 날이면 더욱 운치가 있어 걷기에 그만이다.


특히 여름에 무더위를 피해 해질 무렵 서서히 어둠이 짙어지면 성벽을 비추는 조명이 너무 아름다워 아무렇게나 찍어도 작품사진이 되고, 또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한 낙산공원 정상에서 360도 서울시내의 야경을 무심히 바라보는 느낌은 과히 환상적이다.


한양도성을 축성할 때 시기별로 돌의 크기와 모양을 비교하며 걸으면, 어느새 왼편에 625 전쟁 후에 형성된 판자촌이었던 장수마을이 나타나고, 가파른 언덕길을 한숨 쉬면서 뒤돌아 보면 한국의 비버리힐즈인 성북동이 북악산과 함께 병풍처럼 당당히 서있다.


어느 해 여름밤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하염없이 야경을 바라보며 쉬었던 벤치는 비가 와서 제 구실을 못하지만,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살짝 만지며 지나간다.


동행한 친구 S는 해외파로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느라 국내여행은 거의 가지 못했고, 낙산공원도 처음이라면서 부담 없이 걷는 느낌이 좋아 또 오고 싶어 한다.


우리는 봉제산업의 중심지였던 성곽 아래 창신동 주택들을 쳐다보면서 카페촌으로 유명한 이화 벽화마을로 내려갔다.


과거 낙후된 동네를 개조하여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벽화와 조형물을 설치하여 관광명소가 되었고, 어떤 카페는 서울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전망대처럼 멋지게 꾸며놓았다.


년 전 저녁에 마치 적산가옥처럼 생긴 건물과 나란히 붙은, 허름한 모퉁이 구멍가게에서 동네 아저씨 둘이서 탁자에 둘러앉아 쓴 소주를 마시던 모습을 보았다.


그때 일을 마치고 귀가하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이곳은 1960~70년대로 시간이 멈춘 듯한 서민층의 애환이 서려있는 동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과거 이대부속병원이 있었던 한양도성 박물관을 지나, 억새밭으로 조성된, 넓고 비탈진 공원길을 따라 동대문으로 내려왔다.


창신동 완구거리를 지나, 학창 시절의 낭만과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조흔파의 '얄개전'에 나올만한 기와집인 '허깨비 주막'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막걸리와 파전을 먹으니 우리는 졸지에 빈대떡 신사가 되었고, 또 추억을 얘기하며 타임머신을 타니 순식간에 청년이 되었다.


친구 S는 학창 시절 동대문 스케이트장에서 겪은 첫사랑의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웃음을 주었고, 또 친구 K도 가슴이 벅차오른 듯이 그에 버금가는 추억을 그려 우리에게 상상 속의 나래를 펼치게 했다.


나는 두 친구에 이어서 언젠가 방송에서 들었던 첫사랑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어떤 미혼 남자가 오래전에 헤어진 첫사랑을 못 잊어하다가, 어느 날 카페에서 우연히 그 여자를 보았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그녀를 불렀고, 함께 커피를 마시며 그녀가 결혼했는지, 무엇하고 있는지 등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결혼해 아이가 둘이 있고, 보험설계사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혹시나 했는데 기혼인 그녀에게 실망하며, 과거에 자기를 진정 사랑했는지 확인하고 싶어 마지막으로 자기에게 할 얘기가 없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험 들으실래요? "


~~~


다들 첫사랑의 기억은 잊히지 않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순진해진다.


영국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남성들은 한 여자의 첫사랑이 되고 싶고, 여성들은 한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기를 원한다."는 명언이 떠오른다.


​내 주변을 보면 남자의 첫사랑 대상은 보통 학창 시절에 만난 상대이고, 첫사랑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처음이라는 서투름과 미래를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 그리고 그 기간이 짧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 시절에 이성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더구나 어떠한 조건이나 환경 없이 온전히 자신의 감정만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순수했고, 따뜻했다.


​풋풋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우리는 더욱이 눈비가 오는 날이면 애틋한 노래를 들으며 우수에 젖는다.


오늘 겨울비를 맞으며 낙산공원을 로맨틱하게 걸었고, 또 허깨비 주막에서 MBC 대학가요제 출신 주인장의 기타 반주에 맞춰 "젊은 연인들, 친구" 등 분위기 있는 노래를 불렀으며, 흥에 겨워서 청춘으로 돌아가 첫사랑 얘기까지 꺼냈다.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첫사랑이 심수봉이 부른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일 수도 있고, 권인하가 부른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속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의 첫사랑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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