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는듯한 이 계절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따가운 자외선, 치솟는 온도, 100% 습도… 바야흐로 제주의 여름.
여름 기피 현상은 순전히 에어컨이 없는 집안에서 자라온 탓이다. 주택인 우리집은 항상 여름이면 후텁지근한 바람이라도 들어오길 바라며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 놓았는데, 잘 때마저도 닫지 않은 걸 보면 도둑보다 무서운 건 여름이었나 보다. 자연스레 계절이 바뀌어야 잦아드는 반감은 2018년, 관측 이래 역대 네 번째 최악의 폭염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잃어버린 입맛과 기력으로 인해 몸무게가 10kg 빠지고 종일 마룻바닥에 붙어 시름시름 앓았던 그 여름. 제주에 오게 되면서 매년 반복되는 지독한 폭염의 굴레에서 벗어나나 싶었다. 풀옵션 원룸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어 더이상 다가올 여름이 두렵지 않았으니.
뭐지. 수영장 안에 있는 것처럼 몸이 축축 늘어지고 숨 막히는 이 기분은. 한낮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아스팔트 지열과는 다른 부류의 더위였다. 회사 동료들은 동남아 날씨와 비슷하다며 열대성 고온다습 기후라고 했다. 덧붙여 제주에서 제습기는 선택 아닌 필수라고. 그중 서귀포의 습도는 악명 높기로 유명했는데 항상 95-100% 습도는 기본으로 불쾌지수는 덤이었다. 더욱이 습도가 공포스러운 건 벽지에서부터 심지어 양념통에도 시퍼런 곰팡이가 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다. 이런 상황에도 강제 미니멀리스트는 원룸에 제습기까지 더이상 짐을 늘릴 수가 없어 해를 거듭할수록 곰팡이 제거 노하우만 늘어갔다.
여름의 노하우 또한 알게 됐다. 강렬한 볕과 높은 습도를 피해 즐기는 여름의 기술. 덥다고 축 늘어져만 있기에 제주는 아까운 곳이니까. 한여름엔 지양해야 하는 올레길을 걷고 싶을 땐 여름에도 서늘한 기온을 유지하는 곶자왈 14-1코스를 찾았고, 숲의 농도가 가장 진할 때가 비 온 다음 날 아침인 걸 알게 된 후 그때마다 동네 오름으로 달려갔다. 또 지금에야 초당옥수수가 널리 알려졌다지만 제주 산지에서 처음 맛본 초당옥수수는 생으로도 살짝 익혀서도 달콤함과 아삭아삭한 식감으로 가히 맛의 혁명이었다. 초당옥수수를 입에 달고 살다 못해 자루째로 다듬고 찌고 식혀서 냉장고에 한가득 얼려 놓으면 두고 두고 먹을 생각에 마치 김장처럼 흡족했다.
그렇게 오직 제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장면과 냄새와 맛으로 여름을 보내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무더위도 어느새 지나 있었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보다 녹음이 주는 에너지가, 피부를 에워싸는 끈적끈적함보다 싱그러운 기억들이 여름의 잔상으로 남았다.
이제 제주에서의 마지막 여름을 보내고 있다. 여전히 날씨는 계절의 흔적을 새기듯 폭염을 밀고 오지만 찐득찐득한 이 더위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여름을 붙잡고 싶은 간사한 마음이란. 하루가 아쉬워 매일 집 밖에서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을 보고, 같은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을 만나고, 틈틈히 짐 정리도 하면서 충실히 여름을 지내는 중이다. 혹독했기에 매번 지던 우리의 무수한 밀고 당기기도 이곳에서만큼은 내가 이겼다고 자부한다. 눈부신 태양 아래 나부끼는 바람과 초록이 무성한 수풀, 청량한 바다가 있는 제주의 여름에게 온통 마음을 주었으니까.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