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봤자, 언니는 아빠 없잖아.”
나이가 어린 친척동생이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으면 내게 이런 말을 했고, 이 말은 언제 들어도 익숙지가 않아서 당연히 이길 상황도 자연스레 져주게 되었다. 이 말이 나를 패배자의 느낌을 들게 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이 말이면 내가 대부분의 일을 져준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나보다. 물론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이 어린 친척동생도 윤리적 사고를 갖게 되었는지, 이 무기를 통해 승리하는 일은 줄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나이가 먹은 때에도 종종 이 말은 상대방이 무기처럼 사용하곤 했다. 내 말을 이해해주는 척 내 가정사를 알아놓고는, 결국 뒤 돌아서는 나를 '아버지가 안 계셔서 결국에는 문제가 있을 애'라고 칭했다. 혹은 화가 나면 기다렸다는듯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니체의 말처럼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는 것'보다 '그 사람을 앞으로 믿을 수 없음'이 더 슬펐지만 말이다. 또한, 내가 이 말에 칼에 찔린듯 속상해하는 것을 보면 어린 마음에 정말 내 결점인가 싶어서, 타인의 손에 내 가정사라는 무기를 쥐여주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렇게 그 어린 날들처럼 이유 없는 패배를 겪고 와서 엄마 품에 가로로 안겨 ‘왜 그런 일로 울고 그래. 우리 씩씩한 다운이~’라고 가짜 웃음 아래 안겨 눈물이 닦여질 일은 몸이 무거워지고, 키가 커지면서 없었다. 아니 엄마 품이 울고 있어서 내가 먼저 떠나준 것이라고 고쳐 생각을 하고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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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도 종종 찾아뵙는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자 나의 은사님의 이야기이다. 처음 중학생이 되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아침 조회시간에 호구 조사 통계를 내시며 “아버지나 어머니 안 계신 사람!”이라고 물으셨고, 당연히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우린 쉬는 시간에 어린 마음에, 그리고 나는 해당되지 않는척 ‘미친 거 아니냐.’며 버릇없는 말은 여중생의 특권인양 호들갑을 떨었고, 나이가 든 지금에서야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에 그러신 것’일 거라며, 깊은 뜻을 헤아렸다. 그러고 나서 잘못 뱉은 6글자의 ‘미음’자부터 주워 담았다.
하지만 아직 세상은 ‘결핍’이 위험한 거라서, 난 김치 한 조각을 먹어도 김치소를 덜어내고 배춧잎만 건져 먹어도 어머니께 크게 혼이 나곤 했다. 다른 아이, 아니 다르게 큰 아이는 작은 예의도 틀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 없이 자랐다.’는 건 그 사실 말고, 부산물이 아팠고, 시선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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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게 종종 엄마가,
"착한사람이라는게 바보가 되라는 뜻이 아니야. 너도 너의 권리를 찾을 줄 알아야 해. 울지만 말고 똑바로 말하란 말이야. 세상이 울면 알아서 해결해 줄 정도로 호락호락 하지 않아. 그만 뚝 못 해?"
어머니께서 내게 해주었던 말, 사실은 스스로 다짐같이 하던 말을 고작 9살이었던 내가 알아들었을까. 그 당시에는 그 누구도 내 편을 안 들어주는 것 같은 일차원적 마음에 더 속상해서 보란듯이 엉엉 울었고, 엄마는 그런 나를 애써 입술 물며 외면했다. 하지만 몸이 17살이건 20살이건 언제든 내가 원하는 나이, 그래, 9살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던 나는 매해 그 순간으로 돌아가 '그 말뜻이 무엇이었을까.' 하고 어른들 말의 세계로 한 발짝씩 입성했다.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쯤 난 아빠가 있는 척 얼버무리지 않게 되었다. 내가 굳이 먼저 말하지 않되, 타인이 물으면 진실로 대답해줄 정도 말이다. 또한, 나는 기존에 내가 알던 방식으로서의 착한 사람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특히 외국에 몇 번 나오게 되니 더 절실히 알게 되었다. 외국친구들의 시선에선 나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을 해주고, 종종 웃기고 편하기 때문에, 더 잘 해줘야하고 아껴야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런 장점이 없었어도 나를 아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불편과 손해를 감수해야했던 한국식 선(善)을 위해 노력했었던 과거의 나는 편한 마음으로 한국식 선(善)을 실천한 적이 없기때문에 진정한 착한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식 선(善)을 통해 얻어진 착한 사람, 편한 사람은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이어졌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숨기려고 하고 부끄러워한 나의 모습을 상대가 이용 했었다는 사실까지 알아버리자, '착하게 산다는게 바보로 산다는게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나니 선택하는 일마다, 선택하지 않은 일이 따라오면 분개할 줄도 알게 되었으며, 당연하게 여겼던 것에 의심을 품을 줄도 알게 되면서 조금씩 허깨비같은 세상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깨닫게 된 내 가치와 능력에 내 곁에 둘 사람들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이 나빠 선택이지, 그저 내게 해로운, 나를 흐뜨려놓을 사람을 멀리하는 정도지만 말이다. 그러다보니 내 가치를 내가 선택하고 가꿀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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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스님의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우리가 어떤 사건때문에 힘든 것은 그 사건 자체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사건의 부산물로 인해 힘든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쓰나미도 쓰나미 그 자체보다는 쓰나미에 쓸려오는 자동차며 건물들이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거라고.
그러한 의미에서 내가 글을 읽는 행위나 쓰는 행위를 사랑하는 이유는 저마다 슬픔을 자랑하는 사람들, 작가들 덕분이었다.
박완서 작가의 책에서는 20살, 서울대 국문학과에 들어가고 머지 않아 터져버린 6.25전쟁때문에 잃어버린 사람을 그리고 청춘을 오래오래 아파 한다. 한 책에서 뿐만아니라 이 책 저 책에서 말이다. 심지어는 '더 지겨운 건 육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물줄 모르고 도지는 내 안의 상처이다. 노구지만 그 안의 상처는 아직도 청춘이다.'라고 말하며 말이다.
또, 신경숙 작가의 책에서는 어머니를 잃어버렸던 슬픔이 거의 모든 책에서 등장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어머니를 잃는다. 어떤 책에선 이른 나이에 돌아가시고, 어떤 책에선 병 때문에 아파가는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며 아이를 떼버리고 도망가버리고, 어떤 책에선 집을 나간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 되었지만, 결론은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아팠음을.
그리고 박준 시인은 사랑하던 애인을 이르게 잃었다는 사실이, 한강 작가는 친언니가 되었을지도 모를 존재가 죽은 뱃속에서 자신이 태어났다는 사실같은 것 말이다.
그들로 인해 옅게나마 깊이 위로 받았음을.
물론, 나는 당사자가 아닐뿐더러 독자로서 쓰나미에 딸려온 부산물은 영원히 알 수 없어, 고작해야 쓰나미의 원인 밖에 파악할 수 없지만 말이다.
마치 내가 아버지가 안 계셨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이로 인해 견뎌내야했던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비난과 차가운 시선 그리고 몇몇 친구들이나 친척동생의 무지한 놀림, 그리고 비 오는 날 학교 앞에 우산 두 개들고 딸을 데리러 온 친구의 아버지를 보며 '보기 좋다. 대단하시다.'며 웃음지을 수는 있지만, 교복에 점같은 얼룩 새기며 홀로 비를 맞으며 집으로 뛰어가던 내 모습엔 웃음지을 수 없던 날들, 세상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는 결코 당연하지 않을 때, 내 결혼식장엔 손 잡아줄 사람이 없음이, 그로 인해 조금씩 상처받았을 마음같은 건 나 이외의 누구도 알 수 없듯이 말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눈과 비가 쏟아졌던 날 처음만난 종선오빠가 그랬다.
"다운씨, 힘들땐 그냥 '서자라는 갑옷을 입었다.'고 생각하세요. 자꾸 <Game of Thrones : 왕좌의 게임>이야기해서 좀 그렇긴 한데, 거기서 Peter Dinklage(피터 딘클리지)란 배우가 서자의 역할로 나오거든요. 얼굴도 못 생겼고, 난쟁이고, 게다가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났다는 누명까지 쓰고 있어요. 쉽게 말해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처지이거든요. 그런데 티리온 라니스터(극중 피터의 이름)의 아버지가 서자인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해요.
'사람들은 평생 너를 서자라고 놀릴 것.'이라고요. '서자라는 말은 평생 너를 쫓아다닐테니, 잊지말라고요.'
되게 냉정하게 들리죠? 하지만 아버지가 그래요.
'그 말을 잊지말고, 갑옷처럼 입고 그 서자임을 인정하고, 이용하라고. 그렇기에 더 대단한 사람이 되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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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슬픔'은 나의 갑옷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았음.'은 나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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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 물어야 한다
- 박준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 p.23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