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시간 동안 침묵한 ESL 수업
미국에 오면 시간이 많을 거라고들 말한다. 특히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온 아내라면 더 그렇다.
이유는 단순하다.
F-2 비자는 일을 할 수 없다.
남편을 따라온 아내들은 비자나 영어라는 벽 때문에 이곳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각자의 성향에 따라 미국 생활을 이어 나간다.
어떤 사람은 하루 세 끼를 정성껏 차리며 시간을 보내고,
어떤 사람은 TJ Maxx와 Ross를 돌며 쇼핑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OTT 속 드라마를 모두 섭렵한다.
나의 경우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쉴 새 없이 찾아 헤맸던 것 같다.
꼭 가만히 있는 것이 죄라도 되는 양.
미국에 왔으니 우선 영어를 해 보자는 생각으로 동네 대학교에서 실시하는 ESL Class(영어 수업)를 신청해 보기로 했다. 어찌어찌 핸드폰으로 신청을 했더니 일주일 만에 메일을 받았는데 레벨 테스트를 하러 오란다. 당시에는 차가 없었기에 레벨테스트 장소까지 가는 것도 상당히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시야를 가리고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목적지가 있으면 그냥 간다. 남편에게 호기롭게 레벨 테스트의 필요성에 대해 어필했더니 종일 집에만 있었던 내가 가여웠는지 우버를 불러 주었다.
카카오택시만 애용하던 내 생에 첫 우버였다.
이게 뭐라고 또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집 앞에서 대기하다가 남편이 알려준 차를 타고 테스트 장소로 향했다.
타국 생활이라는 것이 이렇다. 살아본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겁이 나고 위축되는 경험들이다. 나는 내가 꽤 대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나도 새가슴이 되는 걸 느끼니 역시 타국 생활이 쉽지 않음을 배웠다.
15분 정도의 주행 시간 동안 조용한 자동차의 뒷자리에서 처음으로 이 동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우리 집 근처만 맴돌다가 시내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니 고풍스러운 미국 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다. 참 예뻤다.
워낙 나무가 많은 동네라 온통 초록색 빛깔이 가득했는데, 남쪽 동네는 유난히 더 빽빽한 나무 덕에 하늘이 가려져 살짝 어두운 느낌마저 들었다. 높고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진 집들을 보며 내심 신이 났던 것 같다.
ESL Class는 작은 미국 교회를 빌려 수업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들어간 교회 안에서 담당자가 반갑게 맞아 주었고 곧 테스트지를 가져왔는데 세상에! 토익 시험과 상당히 비슷한 유형이었다.
듣기 유형의 문제는 없고 읽기 유형의 문제만 있었는데 지문을 읽고 문제를 푸는 것이 딱 토익 Part 7과 비슷했다. 토익 시험은 대학교 때 친 것이 마지막이었으나 뭔가 대한민국의 교육과정을 무사히 이수하고 수능을 치른 경험치가 남은 건지 문제가 풀렸다!
제한 시간 전에 문제를 다 풀고 다시 우버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우버비만 거의 50불을 쓴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이 아깝고 차가 나왔을 때 시작할 걸 싶기도 한데, 당시엔 뭐든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와서 그 결정이 최선이었던 것 같다. 또 그때의 적당히 낯설지만 설렜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았으니 영 쓸데없는 낭비는 아닐 것이라 믿는다.
시험 결과는 일주일 만에 받았고 나는 가장 높은 레벨의 수업을 듣게 되었다.
사실 가장 높다고 해 봤자 초급, 중급, 상급 세 반 중에 상급반이 된 것으로 엄청난 영어 실력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도 뭔가 모를 흡족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직까지 나 괜찮구나라는 안도감에 더 가깝겠다.
다행히 수업은 온라인으로도 진행되었기에 차 없는 나도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 클래스에 입장하던 날 생각보다 다양한 외국인이 이 동네에 살고 있는 걸 알게 되었고(클래스에는 한국인인 나를 포함하여 중국, 러시아, 이란, 스페인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있었다), 내가 영어를 정말 못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세 시간 수업 동안 나는 자기소개 한 문장만 말했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말을 못 해서가 아니라 언제 말을 해야 하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좌절스러웠다. 꽤나 괜찮았다고 안도하고 있었는데 역시 문제를 푸는 것과 발화를 하는 것은 다른 세상의 일이었군. 자연스러운 영어 발화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말을 못 하니 주 2회 3시간의 수업이 힘들었다. 혹시나 못 알아들을까 걱정이 되고 엉뚱한 대답을 할까 하고 가슴을 졸였다. 점점 수업을 빠지는 날들이 많아졌고 위기감이 느껴졌다.
또 한 번 용기를 냈다. 담당자와 상의한 후 1:1 개인 수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참고로 이 모든 수업은 학교의 지원으로 이루어진다. 대신 1:1 수업은 주 1회 1시간으로 그룹 수업에 비해 시간이 짧았다.
이때 만난 내 영어 선생님이 Kate다. Kate는 지금까지도 내가 힘들고 좌절스러운 기분이 들 때마다 모든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 친구이자 내 American Mom이다.
차가 없다는 이유로 테스트를 미뤘다면, 온라인 수업에서 조용히 포기했다면,
나는 Kate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의 우버 50달러와 조금 내어 본 용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값싼 투자였는지도 모르겠다.
용기가 필요한 미국 생활 이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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