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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Jan 24. 2024

검패국 검패승


‘검정패션공화국 검정패딩완승' 줄여서 '검패국 검패승’ 제 맘대로 구호를 외치게 됩니다. 이 전철 칸에 여기도 검정 패딩, 저기도 검정 패딩. 모두들 같은 옷을 입고 나온 것 같습니다.  유니폼인가요.


우리 눈동자가 검정이라 검정이 잘 어울리기는 합니다. 검정은 빛을 모아주니 겨울철 추위가 덜할 겁니다. 눈 녹아 생긴 흙탕물이 튀어도 얼룩이 보이지 않고요. 단체 속에서 두드러져 보이지 않을 수 있는 비법이기도 합니다.      


검패국 검패승의 도저한 물결 속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그마하고 동그마하고 화사한 빛의 꽃덩어리. 같은 역에서 내려 함께 걸어갑니다. 약간 뒤로 약간 앞으로 따라 걸으며 감탄하며 살피고 있습니다. 붉은 하프 기장 패딩은 동백무늬, 얇게 솜이 누벼진 골프바지는 황금향 빛, 붉은 기가 도는 밤색 모자에는 작은 챙이 붙어 있고요. 같은 색의 목도리는 페이크퍼입니다. 걸음은 재고 손짓은 힘찹니다. 해가 뜨기 전의 어두운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은 잘 갈아 놓은 먹물 위로 내려앉은 동백꽃무더기 같습니다. 동백꽃의 향기는 무엇인가요? 잘 모르지만 차가운 공기 속으로 번지는 향기도 좋군요.      


제 옷장 속을 생각하면 캄캄합니다. 다 좋아서 산 옷인데 온통 검정이라 옷을 찾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옷만 그런가요. 가방도 거의 검정이네요. 그 색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요. 생각해 보니 다른 색을 입어보지도 않았고요. 분홍은 촌스럽고, 빨강은 너무 튀고, 노랑은 어린애 같다고 은근 무시했으니까요.


섣부른 판단이 옷에 한정된 것도 아닐 겁니다. 해보지도 않고 못 할 거라고, 안 할 거라고,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좁디좁은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어두고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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