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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Jan 24. 2024

치마 입은 커피포트


일전에는 저녁을 하는데 정전이 되었어요. 오랜만의 정전이라니, 아파트 전체가 난리가 나겠구나, 하면서 베란다 창 너머를 보니 다 환하네요. 주방 창 너머를 보니 그 동도 환하고요. 옆집이나 아랫집의 상황은 어떤지 보려 했으나 볼 수가 없더라고요. 이 시간에도 근무를 하시는지 관리실에 전화를 하니, 통화 연결이 되었습니다. 바로 와서 보시고는 뭘 쓰고 있었나 물으십니다. 전자레인지, 커피포트, 밥솥, 인덕션 두 구를 사용하고 있었지요. 그것들 중 범인이 있을 거라고 하십니다. 일주일 후, 또 정전이 되었어요. 요번에는 커피포트와 인덕션 한 구를 쓰고 있었습니다. 다시 오셔서는 아무래도 커피포트 문제 같다는 진단이 나왔어요. 교체하거나 AS를 받아야 할 거라고요. 거기서 물이 흘러내려서 고여 있다가 누전이 되는 거라고요.


범인이 있었어요. 전기포트가 아니라 사람이요. 다들 계량컵에 정수기 물을 받아서 붓는데 커피포트에 바로 물을 붓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포트 옆으로 물방울이 흐르고 그것이 모여 누전을 일으킨 겁니다. 범인을 엄벌하고 조심하자고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 커피포트에 옷을 입힙니다. 입구나 머리로 물이 들어가도 옆으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치마와 벨트를 해준 겁니다. 나름 귀여워요. 이후로는 정전 사태가 벌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바위를 뚫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누전을 일으키는 경험은 처음입니다. 매사 조심해서 천천히 해야겠습니다. 관리실 아저씨를 기다리던 잠시 동안 식탁 위에 켜둔 촛불을 보며 전기가 없으면 정말 큰일이겠구나 다시 한번 고마웠어요. 익숙해서 잊어버린 문명입니다.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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