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전쟁의 안부와 안녕
1945년 해방 후 한반도는 또다시 각축장이 됩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빠져나갔지만 분단된 남북한이 미국과 소련을 등에 업고 동족상잔을 하는 비극적인 장소가 되었지요. 이 시대는 당신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1950년 9월 10일부터 월미도에 대대적 공습이 이루어집니다. 9월 15일 새벽, 함정과 전폭기를 동원하여 월미도를 맹폭하는 가운데 미 해병대가 월미도 그린비치에 상륙하게 되지요. 인천상륙작전입니다.
이때 인천에 주둔했던 인민군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보내려고 했던 편지 모음이 발견되었습니다. 전체 97편의 편지인데요. 수신인은 부모님, 형님, 처, 자식들로 다양하고요. 대개는 ‘자신은 건강하게 잘 있고, 편지를 받는 대로 회신해 달라’는 이야기들입니다. 편지를 쓴 시점이 1950년 9월 10일에서 14일이고 인천상륙작전 개시일이 9월 15일이니 회신을 고대하는 편지가 유서가 되었습니다. 김준길 씨가 자강도 희천군의 도영이에게 보낸 편지를 좀 보세요.
발신: 경기도 인천시 우편국 사서함 1의 4호 김준길
수신: 자강도 희천군 신풍면 서양리 부흥참 한창주 앞
날짜: 1950년 9월 10일
道英이에게
그간 道英이는 학교에 열심히 공부해서 장래 씩씩한 조국의 한 일꾼이 되어라.
그간 어머니 모시고 안과도일함을 원념에서 축복하며 그리고 일농이를 잘 간수하여라. 도영이는 일농이와 다리고 학교에 가 공부를 하여라. 그렇게 아니하면 어머니가 곤란할 터이니까 네가 생각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곤란한 터이니 너는 어머니 말씀을 잘 들어서 복종함을 나는 부탁하네. 나는 경기도 인천시에 와서 나는 몸이 건강하여 군대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 나의 걱정은 말아라. 너는 공부 잘 할 것만 부탁한다. 너의 어머니가 병중을 보고 와서 나는 근심 그뿐.
발신: 경기도 인천시 우편국 사서함 1의 4ㅏ호 金萬植
수신: 자강도 희천군 동면 갈현동 대참 3반 김金一善(자식)
날짜: 1950년 9월 11일
미 해병대는 인민군들을 무력화시키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글의 앞부분에 월미공원 입구의 노란 현수막 기억하시지요. ‘인천상륙작전으로 가족도 잃고 고향도 잃은 억울한 월미도 원주민들에 대한 피해보상과 귀향대책을 수립하라’는 내용이요. 1900년 무렵 월미도에는 53호의 촌락이 형성되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원주민이 살던 곳을 강제로 철거시키지요. 하여 원주민들은 월미산 중턱의 마을을 떠나 월미도 내 북성동으로 보금자리 마련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제 말에 다시 월미도공원 조성의 미명 하에 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석유창고가 있던 해안가인 북성동으로 옮겨가서 살게 되었지요. 이렇게 쫒기고 다시 쫓겨 간 그들을 기다린 게 어이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진행된 상륙작전입니다. 이 작전에는 7만 5천여 명의 병력과 261 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되었지요. 2주 후 유엔군은 서울을 점령하게 됩니다. 작전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이었고요. 당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힘겨운 방어전을 벌이고 있었다고 해요. 반면 인천은 낙동강에서도 부산 교두보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고요. 조선인민군이 거의 방어를 하지 않고 있어서 기습 작전을 개시하였고 유엔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인천을 수복하였고 서울 수복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유공원에 맥아더장군 동상이 세워졌지요.
미 합동참모부는 상륙작전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인천으로 하는 것에는 반대했다고 해요. 인천의 수로는 협소하여 대규모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하고,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10미터에 달해 썰물 시 해안에 2~5 킬로미터의 갯벌이 생겨나서 상륙함의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분석이었지요.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전개한 상륙작전의 경험을 살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인천상륙작전 수행 전에 장사상륙작전 등을 먼저 시행하여 조선인민군의 주의를 분산시킵니다. 인천 앞바다에 있는 월미도 상륙작전 전에 두 번이나 전투기로 공습하고 포격하고요. 미국 군함의 맹렬한 포격과 전투기 공습이 있은 후에 미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입니다.
월미도 폭격 계획을 세우는 데 인천 파견 정보장교 클라크 대위와 한국 해군 첩보대가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대위는 인민군이 1천 명 정도 있다고 보고했는데요. 한국 첩보대의 조사에 따르면 인민군은 400 명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600 명은 120 가구의 주민들이라는 겁니다. 1950년 9월 10일, 월미도 동쪽의 민간인 마을에 네이팜탄이 떨어집니다. 월미도의 민가와 주민들을 모두 적의 시설과 병력으로 간주하고 이루어진 작전이지요. 초가집과 창고들을 불태우기 위해 네이팜탄을 95발이나 투하하고 폭격을 피해 다리로 갯벌로 뛰어가는 민간인들에게까지 기총소사를 합니다.
그리고 11일 하루 쉬고, 12일부터 시작해 13일, 14일과 상륙 당일인 15일까지 매일 월미도에 집중 폭격과 함포 사격을 가합니다. 숲이 완전히 사라지고 타다 남은 나무들만 앙상한 기둥이 되어 민둥산에 꽂혀 있었고요. 온 섬의 땅이 파이고 뒤집어져 발목이 빠질 정도로 푹신푹신해지는데 비가 내려 땅이 젖듯 땅이 화약에 푹 젖을 때까지 포탄 수천 발을 떨어뜨린 것입니다. 15일 오후에 폭격이 잦아들자 피신했던 원주민들이 돌아와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가매장했는데 며칠 후 다시 가보니 집과 무덤은 불도저로 완전히 정리되어 흔적을 찾을 길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로는 미군들이 거주하며 군 작전상 방해된다는 이유로 보상도 못 받은 채 쫓겨나게 되지요. 이것이 월미공원 입구의 노란 현수막의 진실입니다.
월미도 해상 수장사건도 있었습니다. 1950년 10월 중순 강화도와 인천 월미도 앞의 선상에서요. 가해자는 우익무장유격대, 강화향토방위특공대, 교동해군특별공격대라고 합니다. 피해자는 강화도와 교동도 김포 등지 부역 혐의자와 가족, 월북혐의자 가족 등 100여 명이고요. 풍문처럼 떠돌고 있는 사건이지만 구체적인 자료나 증언자가 나타나지 않아 베일에 가려져 있다가 생존자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령으로 1950년 7월 22일 비상시 향토방위령을 발표하고요. 강화에서도 이 법률에 의해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결성되는데요. 이들은 공비, 인민군, 부역혐의자들을 손가락 하나로 신고할 수 있었고 의심되는 자는 48시간 동안 마음대로 취조할 수 있었다고요. 이들은 별도의 무기와 건물을 소유할 수 있었고요. 이 법이 부역자를 처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교동 강화 김포 등지에서 부역혐의자를 선상에서 재판하고 처형하는 데 남용되었다는 것이지요.
당시 부역혐의자를 체포하여 월미도 앞 선상에서 재판하고 수장하는데 재판에 소요된 시간은 1인당 10~15초 정도로 ‘아무개 사형’, ‘아무개 10년’을 언도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들은 발목에 돌이 묶인 채 수장되었고요. 과오는 처벌받는 게 맞습니다만 재판과 형의 언도가 정당하게 이루어졌을까 의심스럽습니다. 개개인의 호오가 개입되지 않았을까 의심스러워요. 특히 인천 지역은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기간 동안 다른 어느 지역보다 좌우익 갈등이 극심했던 인천 지역이니 어이없는 참혹의 일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막 입대를 한 제 아이 생각을 했습니다. 완전한 평화의 시대는 아니지만, 전쟁 중이 아니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요. 길에서 군복을 입은 청년들을 보면 마음이 짠해집니다. 가장 빛나는 청춘의 시간을 나라를 위해 바친다는 게 말이 쉽지요. 여자여서 군대 생각은 해본 적 없었는데 이제 남의 일이 아닌 겁니다. 더우면 더워서 걱정이고 추우면 추워서 또 걱정이고요. 군대에서의 사건사고들을 전해 들으면 걱정이 산더미입니다. 오늘 이 평화의 까닭이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죽음 덕분이고요. 지금의 우리 아이들 덕분이겠지요. 아이가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