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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Feb 17. 2024

건널목 푸른 속옷


 건널목 얼룩무늬 위로 초록 물체가 보인다. 목도린가 아니 얇다. 종이봉툰가 아님 장바구니? 가까이가며 보니 남성용 팬티였다. 몸체는 초록, 허리 밴드에는 로고, 드로즈 스타일. 고탄력 밴드, 입체재단, 스판소재, 거의 새것처럼 선명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옥상 빨랫줄에서 낙하? 코인세탁을 하고 가다가 분실? 한 박스 선물 받고 기쁜 마음에 꺼내보고 고맙다 인사하며 떠들며  가다가 흘린? 배가 아파서 길에서 볼일 보고 휴지 대용? 아침에 샤워하고 급히 나오다 보니 속옷 미착용이라 급히 주머니에 넣고 나오다가 빠짐? 궁금하던 차에 정화조 차량이 선명한 파란색 둥근 몸체를 자랑하며 냄새도 없이 조용히 달려간다. 이것이 동시성의 암시라면 아무래도…


아무 생각 하기 좋은 주말 아침, 부자란 맘에 꼭 드는 속옷을 여유로이 갖고 있는 것.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체감하는 것. 정확한 사이즈와 취향의 새 속옷은 셀프 사치와 존엄의 증표가 아닐까. 와이어가 사라진 브래지어는 정확하게 행복하게 해 준다. 거들이며 코르셋 같은 고문적 도구들은 타인 지향의 시각에서 발명되었을 텐데. 해방은 기본적인 것들로부터 시작되곤 한다. 지금 나를 조이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은 이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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