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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Feb 21. 2024

갑자기 두려워집니다

일기를 쓰는데 그게 점점 짧아져요. 일기 쓰기 좋은 시간 같은 건 오지 않기 때문이죠.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약간의 운동에 이어 졸음에 밀려 일기는 자꾸 번외가 됩니다. 거의 필기체(><)로 그날의 하이라이트만 적고 있네요. 적지 않으면 살지 않은 삶이 될 것 같아서요. 오늘 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침 참치묵은지김밥 세 줄, 저녁 눌은밥 청양고추계란말이와 밑반찬. 비 맞고 퇴근. 정수기 정기점검. 0000 향수 주문. 000 시인의 신작시집 도착.


무슨 일기를 이런 식으로 쓰냐고요. 반성이 필요합니다. 재수할 때는 하루 한 줄 일기를 썼어요. 무슨 의식을 행하듯 천천히 정성스럽게 얇은 공책 좁은 칸에 모나미 볼펜으로, 어떤 날은 빨간색 어떤 날은 파란색, 1년이라야 365 줄에 불과하니 몇 장 안 되지만 보기에 좋았습니다. 매일 뭔가 하고 있다는 기분이랄까요. 그게 그 시간의 증명이면서 작은 해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보다 지금은 제법 해방되어서 소홀히 쓰는 것일까요. 내일부터는 메뉴와 날씨와 구매와 도착 외에 그날의 감정에 대해서도 짧게 쓰려고요.      


p.s. 1 참치묵은지김밥 정말 맛있어요. 묵은지는 없으니 김치를 살짝 헹궈서 꼭 짜고 들기름으로 무칩니다. 잎사귀 부분은 조금 잘라내고 고갱이 부분으로 하는 게 식감이 좋습니다. 간을 한 밥 위에 깻잎 두 장 길게 얹고, 기름 뺀 참치통조림에 마요네즈 약간 넣고 후추 톡톡 뿌린 것을 얹어서 말아줍니다. 참기름과 깨소금 뿌려서 드세요.


p.s. 2 김은 10장 들어있는 걸 사는데요. 예전엔 그걸 한 번에 다 먹지 못하니 눅눅해져서 버리곤 했어요. 이젠 김 봉지에 개봉 일자와 몇 장 남았는지 적고 봉지 끝을 접어서 박스테이프로 야무지게 밀봉합니다. 3번 혹은 4번에 걸쳐 한 봉지를 알뜰하게 바삭하게 완전히 소진할 수 있어요.      


이렇게 쓰고 나니 읽어주실 분들께 죄송스럽습니다. 방향성 있는 주제, 세련된 구성의 글이 아니라서요. 나 좋자고 타인의 시간을 갈취하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두려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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