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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Mar 09. 2024

무슨 비상가방

언젠가 만화책에서 '슬픔완화세트'  였던가 혹은 '슬픔비상가방'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커다란 배낭식 가방에는 부드러운 수건, 단 것, 만화책, 소리가 나는 이상한 장난감, 같은 것들이 들어있거나 매달려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 혼자 집을 보던 기억이 나네요. 텅 빈 집, 네모진 마당 위로 뾰족하게 이마를 들이민 처마, 바람이 불어 풍경이 흔들리고,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어두침침한 하늘. 시계가 댕댕 우는 마루는 어둑어둑한 것이 울기 딱 좋은 순간입니다. 무서웠던 건지 심심했던 건지 엄마가 보고 싶었던 건지 다 뒤섞인 건지 훌쩍훌쩍 소릴 내며 흐느끼려는 순간 사촌언니가 옵니다. 갑자기 왜 왔는가 물으니 엄마가 내가 무서워할 거라고 같이 있어주라고 했다고요. 눈물이 쏙 들어갔지요. 당시 저의 울음강화세트는 엄마의 부재였을 텐데요.


무슨 비상가방이 필요하세요? 거기 뭐를 넣으실 건가요. 향수, 베개, 이불, 잠옷 그리고 넉넉한 시간, 청소 끝낸 집, 마르기를 기다리는 건조대의 빨래들, 한라봉이랑 보온컵의 커피랑 책이랑 좋아진 음악 같은 것을 넣으려고요. 가능하다면 맑은 햇살도요. 생각하다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베개와 이불은 빼도 되겠어요. 담배꽁초가 잔뜩 떨어진 나무 아래 꽈리고추 하나가 떨어져 있네요. 아주 싱싱해요. 자전거 옆에 유모차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고요. 오늘의 귀여움입니다. 무슨 비상가방은 집어넣고 천천히 걷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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