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피하다-escape-避 : 고려궁지
고려는 고종 19년(1232년)에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후에 최이로 개명)의 권유로 도읍을 강화도로 옮깁니다.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우는 군사 200명을 보내 궁궐을 지은 후 자기 짐과 전 재산을 강화도로 먼저 보냅니다. 장마가 휘몰아치는 계절에 고종과 신하들과 그들의 가족을 데리고 강화도 궁궐로 들어가지요. 몽골은 물에 약하니 개성에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바다를 방어선으로 삼고 싸운 전략이 주효했습니다. 고려의 강화 천도 때 세운 고려궁은 1270년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수도를 옮기며 모두 허물어져서 역사 기록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입니다. 원종 11년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8년간 사용되었습니다. 궁궐의 규모는 송도보다 작지만 전체적 모양은 비슷하게 만들었고요. 정전 외에도 14개나 되는 궁궐의 전각이 있었다고 해요. 궁궐 뒷산인 강화 북산을 송악산이라고 바꾸고 고려궁을 중심으로 주변의 지명과 궁궐 각 건물 및 문루까지도 개성의 궁궐을 모방했다고 합니다. 궐외 각사 및 관리들의 거처도 만들고요. 궁궐의 신축과 더불어 백성들의 집도 수 천 채씩 대대적으로 신축했다고 합니다. 고려궁 주변에 민가가 모이면서 한 번의 화재로 이웃한 민가 1,000호가 불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의 도읍이 강화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몽골은 이후 30여 년간 지속적으로 침략합니다. 최우는 강화도 천도 뒤에 몽골군이 고려를 짓밟고 백성들을 도륙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화도와 육지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려고도 합니다. 울릉도로 백성들을 대피시키려다 서해의 풍랑에 수장되는 사람들이 많아져 중지시키기도 하고요. 각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산이나 섬으로 이주시키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합니다.
고려처럼 조선 또한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강화로 발길을 돌리려고 했습니다. 몽골에 대한 고려 정부의 이동도 그렇고 두 차례에 걸친 호란을 경험한 조선 정부의 강화행도 마찬가지이지요. 조선 초기 강화행궁은 고려에 비해 작은 규모였습니다. 고려궁이 있던 곳에 행궁을 건립하고 그 주변에 강화유수부와 외규장각을 세웁니다. 외규장각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드릴게요.
고려궁은 고려궁터라는 이름과 달리 조선행궁의 유적이 더 많이 남아 있어서 혼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 보는 맛이 나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