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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Jun 08. 2024

초여름 오후의 당신

가고 싶다고 가자고 했다가 말자고 했다. 이러다가 싸우겠어. 십 년째 안 들어주는 일. 대체 왜, 하면서 이런 대화가 80번은 반복된 것 같아서. 그러거나 말거나 좋으실 대로, 당신 인생은 당신 것, 이라 생각하라시던 법문을 떠올리며 맘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갑시다. 가요, 하며 도착한 곳은 초여름 오후의 선원. 텅 비었다. 고요한 중에 빛으로 가득하고 몇 사람이 기도를 하고 제를 올렸다. 위패 앞에는 요구르트 세 개, 혹은 떡 한 팩. 어느 곳에는 플라스틱 통 안에 누룽지가 가득하고 검은 것은 김인지.. 그 곁으로 흰 국수 한 다발. 여기저기 생화와 조화가 피어있고 어느 분이 딸아이 생일 떡이라며 주시는 백설기 한 덩이는 부드럽고, 새들은 겁 없이 가까이 내려앉았다.


그는 내 원을 들어줄 것이다. 그가 원하는 시간이 되어야만 그렇게 할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보다 그가 더 바라고 있을 수도 있다. 그의 용단을 막고 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것 또한 끝까지 고집을 부리진 못 할 것이다. 그라는 타인의 삶, 타인의 선택을 내가 어쩌겠는가. 화는 이미 가라앉았고 말씨도 다정해진 채 물가에 앉는다. 그는 18번 경문의 도입부를 외운다. 불교 고교를 나와서, 수업마다 배우고 외우고 괄호 넣기 시험을 봤다는 그 경. 끝까지 외울 수 있다는 호언장담에 어디 한번 해보라고 했다. 그는 외우기 시작하고 맞는지 아닌지 잘은 모르지만 거의 맞는 것만 같고.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이 잘생긴 부처 같아서, 내 집이 세상 유일의 보궁임을 잊고 산 것 같아서 두손을 정성스레 붙이고 애정어린 합장을 하며 물개 박수까지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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