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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Jun 22. 2024

정성스럽게 읽는다는 것

"국도는 직접 걸어가는가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가에 따라 다른 위력을 보여준다. 텍스트 역시 그것을 읽는지 아니면 베껴 쓰는지에 따라 그 위력이 다르게 나타난다. (…) 베껴 쓴 텍스트만이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린다. (…) 중국에서 필경사는 문자문화의 비할 바 없는 보증인이며, 필사, 즉 베껴 쓰기는 중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다."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속 구절입니다. 필사했어요.


시 한 편을 필사합니다.

"몸에 든 멍을 신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은 내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다 내가 물비린내를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 빛과 함께 내려올 천사에 대해, 천사가 지을 미소에 대해 신이 너무 상세히 설명해 주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미 본 것 같았다// 반대편에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왔다// 저를 사랑하세요? 내가 묻자 신은, 자신은 모든 만물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저만 사랑하는 거 아니시잖아요 아닌데 왜 이러세요 내가 소리치자// 저분들 싸우나 봐, 지나쳤던 연인들이 소곤거렸다// 신은 침착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신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강을 보고 걷는다 강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강이 무거운 천처럼 바뀌는 것을 본다// 그것을 두르고 맞으면 아프지만 멍들지는 않는다// 신의 목소리가 멎었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연인들의 걸음이 멀어지자 그는 손을 빼내어 나를 세게 때린다" 차도하의 <성실하게 사랑하기>입니다.


필사하면 천천히 읽게 됩니다. 오타가 없는지 살피며 행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어떤 시가 좋은가, 하면 할 말이 많아지는데 이 시의 경우 진짜라는 느낌을 줍니다. 진실이 진실로 진실인지는 차치하고요. 시적 재료란 자유로운 선택의 부분이니까요. 시인이 내면의 무언가와 감응하며 써 내려가는 어떤 시간이, 기억이, 상흔이 전해집니다. 필사는 정성스러운 읽기의 다름 아닌가 싶습니다.


시인이 찾은 곳에서 이제 편안해졌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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