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흥겨운 자리였습니다. 다들 큰 소리로 웃고 떠들었어요. 가만 보니 모두들 마스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벌써 이래도 되는 걸까, 놀라서 입을 가리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무궁무진, 강화도(전편)”이 나가고 또 한 계절이 지나갔습니다. 어제 오늘은 갑작스럽게 기온이 내려가서 서늘하네요. 그 기운이 좋아서 창은 열어두고 스웨터를 입습니다. 마스크도 그대로고 모임을 자제하는 분위기도 여전하지만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건강히 지내셨습니까.
가을에 소개해드린 “우리들의 무궁무진, 강화도 (전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1. 만들다-make-作 ; 주먹도끼
2. 버리다-throw-廢 ; 패총
3. 보이다-show-示 : 청동검
4. 묻다-bury-埋 : 고인돌
5. 빌다-pray-祈 : 참성단
6. 밝히다-light-燈 : 전등사
7. 피하다-escape-避 : 고려궁지
8. 새기다-carve-刻 : 고려대장경
9. 기록하다-record-記 : 병인양란록
10. 찍다-take-撮 : 사진엽서
11. 저항하다-resist-抗 :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12. 보관하다-keep-保 : 정족산사고, 외규장각
전체 내용은 24개의 키워드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한글-영어-한자’인데요. 한글은 ‘동사’이고 영어와 한자는 제 맘대로 연상되는 것으로 했습니다. 단순 번역이 아님을 밝힙니다. 다음 장소로 떠나보실까요.
13. 쓰다–write-書 : 이규보, 조경희, 함민복
1) 이규보
이규보(1168~1241)는 고려시대 무신집권기에 활동한 문인입니다.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종기가 온몸에 퍼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고요. 아홉 살부터 문장을 지을 수 있었고 다양한 독서를 즐겼고 기억력이 뛰어나 한 번 보면 모두 기억하였다고 합니다.
자라며 시 짓기 대회마다 계속해서 일등을 차지했는데 왜인지 그 후에는 계속 떨어지다가 22세에 사마시에 일등으로 합격합니다. 이규보의 초명은 인저(仁氐)였는데 사마시 보기 전날 꿈에 문학을 관장하는 규성(奎星)이 그의 합격을 미리 알려주어 ‘규성의 보답’이라는 의미로 ‘규보(奎報)’라고 바꿉니다. 23세 6월에 예부시에 합격했으나 등수가 낮아 사양하려는데 아버지의 꾸지람으로 사양하지 못했다고요. 이후 31세까지 벼슬을 받지 못하고요. 32세 9월 전주목사록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12월에 파직. 이후 반란에 종군하고 개선하여 개성으로 돌아왔으나 전투 참여 공로를 인정받지 못해 상을 받지 못합니다.
40세 12월 임시직인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는데 당시 권력자인 최충헌의 모정(茅亭)에 기문(記文)을 지은 것이 일등으로 채택, 41세에 정식으로 부임합니다. 이후 51세까지 문학 관련 벼슬에 여러 차례 종사하지요. 그의 『동명왕편』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출생과 성장, 건국 기록을 테마로 한 영웅적 민족서사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쓴 동기에 대해서는 유교적이고 신라사 중심인 삼국사기에 반대 의견을 제기하기 위해 썼다, 외적이 침략하는 시기에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 침략에 대한 항거 정신을 높이기 위해 썼다. 집권자에게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과시하고 벼슬을 구하기 위해 썼다는 주장 등이 있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들이 동시적으로 작용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노후 10년을 강화에서 보내며 몽골에 보내는 외교 문서, 대몽 항정을 독려하는 글, 팔만대장경 판각을 하늘에 고하는 글 등 칼 대신 붓을 들었고요. 10년을 강화에서 살다가 강화에 묻혔습니다.
그가 쓴 글을 좀 보실까요. 고종과 신하들이 강화도 궁궐로 피난을 들어갈 때 이규보의 종은 도망을 갔다지요. 이규보는 다음의 시를 짓습니다.
도망간 종아!
서강을 건너면서 너는 도망갔으니
새 서울로 들어가면 굶을까 염려해서겠지
풀을 꺾어 점치고 닭으로 점쳐 봐도 찾을 수 없으니
어디에 그리 깊숙이 숨어 있느냐
(출처는 이동연, 『강화도, 미래신화의 원형』, 푸른세상)
이규보의 시나 고려사의 기록에는 노예며 승려들이 단순히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강화도로 가는 것을 거부한 도적 떼나 약탈자라고 비하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승려들이나 노비들은 지배계급 타파를 위해 최초로 연대하여 민중 봉기운동을 일으킨 것이라고요. 이 운동은 조정에서 보낸 토벌군과의 전투에 패하여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의 시 <우물 속의 달>도 유명하지요.
산 속의 스님이 밝은 달을 갖고 싶어
항아리 가득 물과 함께 담았지
절에 도착하면 그제야 알게 되겠지
항아리 기울여 물 쏟으면 달빛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규보 산문선을 읽었습니다. 그의 『동국이상국집』 전집과 후집 중 뽑아서 번역한 것인데요. 지금 이 거리를 거닐고 있는 이웃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조선시대의 산문들과 결을 달리하는 작품을 창작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시콜콜한 일들에도 관심을 기울였고요. 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이, 시 귀신, 술병, 다리가 부러진 궤, 쥐, 집수리, 정원 풀매기, 관상가, 뇌물, 이별, 여행 등 다채롭습니다. 해학이며 재치가 넘치는 글을 남겼습니다.
또한 규보가 말한 “시를 지을 때 버려야 할 아홉 가지”가 있습니다.(論詩中微智略言) 일부를 옮깁니다.
“대저 시는 시상(意)을 근본으로 삼는데, 구상이 제일 어렵고 말을 엮는 것은 그 다음으로 어렵다. 시상은 기(氣)의 높고 낮음에 따라 깊거나 얕게 된다. 그러나 기는 하늘에 달린 것이지 배워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가 낮은 사람은 글을 수식하는 것을 훌륭한 글이라고 여기고, 시상을 우선시하지 않는다. 대개 문장을 아로새기고 구절을 꾸미면 진실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속에 함축적이고 심오한 의미가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완미할 만하지만 두어 번 곱씹으면 여운이 없다.”
“또한 시를 구상할 때에 깊이 생각하다 헤어나지 못하면 빠지게 되고, 빠지면 고착되고, 고착되면 미혹되고, 미혹되면 집착이 생겨 통하지 않게 된다. 오직 자유롭게 출입·왕래하고, 앞뒤를 살피며 변화무쌍해야 막히는 것이 없어 완숙하게 된다."
다음은 ‘시에 있는 아홉 가지 좋지 않은 체(體)’입니다.
“시 한 편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수레에 귀신을 가득 태운 체’다. 옛 시인의 구상을 훔치는 것은 잘 훔치더라도 옳지 않거나와 제대로 훔치지도 못하는 것은 ‘어설픈 도둑이 쉽게 체포되는 체’다. 어려운 운자를 달되 근거가 없는 것은 ‘강한 활을 감당하지 못해 쩔쩔매는 체’다. 자신의 재주를 헤아리지 못하고 함부로 운을 다는 것은 ‘술을 지나치게 많이 먹은 체’다. 어려운 글자를 자주 사용하여 남을 쉽게 미혹되게 하는 것은 ‘구덩이를 파서 맹인을 인도하는 체’다. 말이 순조롭지 못한데 억지로 인용하는 것은 ‘남을 윽박질러 자신에게 동조하게 만드는 체’다. 평범한 말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촌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체’다. 꺼리는 말들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존귀한 존을 능렬하는 체’다. 시어가 거친데도 다듬지 않는 것은 ‘온 밭에 잡초가 무성한 체’다.”
“배나무 접붙이기(接菓記)”라는 산문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습니다. 접붙이는 일은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 가을에 배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을 보고 나중에는 진실인 것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 얼토당토않고 괴이하다고 여겼던 의심이 사라졌다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9년이 흘렀지만 나무를 보거나 배를 먹을 때면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고요. 잘못을 고치고 선으로 옮겨 가라는 뜻일 거라고요.
고려시대 농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신정권이나 문신 이규보나 시대적 모순을 개혁한 세력이 아니라 동질의 고통을 주었던 세력입니다. 이규보가 태어나고 2년 후에 무신정권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술과 거문고와 시를 좋아했던 이규보를 비난하기는 쉽지만 어느 시대나 좋은 인정을 받고 제대로 먹고 사는 일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