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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은경 Oct 24. 2024

이 옷을 제가 입겠습니까

어리석었을 때 입었습니다, 밍크. 한겨울, 부푼 배를 하고 회사 언덕을 올라갈 때 맹추위도 덜했고요. 아이와 나의 하나 된 몸을 감싸 안아주는 옷은 보호와 안심의 기분을 더해주었어요. 동물을 잡아서 식구들의 허기를 채우고, 가죽은 옷으로 신발로 만들던 시대의 여인처럼요. 결혼 예물이었습니다.


그 옷은 점점 자라요. 무겁고 무서워집니다. 후회막급인데 버릴 수도 없고 장 속에서 부피감만 자랑해요. 변화된 심정의 까닭은 밍크에 대해 알게 된 다음이었지요. 이런 옷을 입는 사람들을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과거의 저를 포함해서요. 버리려다가 못 버리고, 받겠다는 사람도 없어서 수선을 합니다. 하프기장의 주름진 밑단과 소맷단을 자릅니다. 팔부길이 소매 숏 기장의 코트 탄생. 잘린 것으로는 목도리 세 개. 그걸 입었냐 하면 아닙니다. 또 옷장 신세, 그러다가 압축팩에 넣어 창고로.


그러다가 다시 수선합니다. 소매를 잘라서 조끼로요. 모든 수선은 셀프입니다. 바느질 좋아해요. 명상하는 기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지요. 생각보다 쉽습니다. 그렇게 이 조끼가 탄생했습니다. 잘라낸 두 소매는 버립니다. 이제 이 옷을 제가 입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밍크 아니라고 대답하며 입으라던데 그러면 입을 때마다 거짓말을 해야 하고. 밍크라고 답하면 천하의 파렴치한이 되니까요. 이미 과거의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어요. 어쩌자고 밍크 같은 것을 원했을까요. 가죽구두, 가죽가방, 가죽장갑 그런 것들도 이젠 사지 않습니다. 오래전에 철들었어요.


가죽 위의 가죽, 살점 속의 살점이 인간의 일상이긴 합니다. 고기를 먹고 야채를 먹고 우유를 마시고, 어느 것 하나 타자의 목숨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먹고 먹히며 사는 게 순환이고 순리겠지요. 최소한으로 하려고요. 하지만 불사의 옷 같은 것은 (밍크처럼) 결코 탐하지 않겠습니다.


p.s. 밍크 수선은 점점 작게 만들어서 놓아주려는 속셈 같습니다.

수선완성
수선 과정
처음 옷은 이것과 비슷했어요. (사진은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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