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싫어한다는 허언

by 김박은경

기다리던 여행은 며칠 전부터 텐션을 올려준다. 여행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했으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도 부르고 뭘 해도 허허 웃고 사람들을 미리 이해해 주고 마음 상할 일이 전혀 없다. 그러다가 여행 출발일이 다가오면 조금씩 가라앉다가 여행 출발하는 아침이 되면 현저하게 우울해진다. 돌아올 날의 마음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행을 떠나는 내가 있고,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내가 있고, 여행을 갈 수 없는 내가 있고, 여행을 다녀온 내가 있고, 그 여행을 그리워하는 내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양자역학의 세계나 다중 우주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상정해 보면 여행의 전후가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다. 대폭죽놀이처럼 여기서 펑, 저기서 펑, 눈부시게 빛나면서 캄캄한 구석이 뒤섞였으나 질서 정연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세계.

그럴 정도로 여행이 기쁘고 행복해서 매 순간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동향의 이 숙소는 고도 40미터, 베란다 통창 옆에 누우면 바다가 나란히 눕는다. 이런 곳에서 무슨 특별한 글이라도 쓰고 싶지만 그냥 파도를 차렵이불처럼 덮고서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득히 좋다, 좋아서 또 좋을 일을 궁리하는 게 사치 같다.


일어나 앉아서 바다를 보면 물 들어오는 풍경이, 출렁거리는 파도가 거대한 초서 꾸러미처럼 보인다. 초서는 풀 초 자를 쓴다. 초고의 고는 볏짚 고를 쓴다. 그 연유에 대해 중국 오대 말기 남당의 문자학자였던 서개(徐鍇: 920~974)는 <설문계전(說文繫傳)>에서 稿(高자가 禾 위에 있음) 자에 대해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草稿라 하는 것은 마치 들판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볏짚 마냥 조심하지 않고 거칠게 쓴 글 또는 다듬지 않은 문장을 이른다"라고 밝혔다. 퍼덕이는 파도가 바람에 들썩거리는 짚단 같다, 아니 짚단이 파도 같다고 해야 하나.


짚단이나 파도나 어지러운 중에 보여주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같은 말을 조금씩 다르게 하는 사람 같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조심해, 더 먹어, 아프지 마, 춥다, 우산 갖고 나가, 장갑 끼고 다녀, 좀 자 그런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 다 다른 말이지만 다 같은 마음으로 하는 이야기. 여행 마지막 날에는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게 좋다. 여행을 싫어한다는 허언은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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