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준비물

by 김박은경

부산 금호온천이다. 1층은 여탕, 2층은 남탕, 그 위로 객실도 있다. 주차장 경비실 작은 서랍장 종이뭉치 위에는 엎어진 채 놓은 돋보기안경 하나, 바로 옆 붉은 플라스틱 선반 위에는 화장실용 커다란 두루마리 휴지와 나무젓가락 한 벌과 지도책과 헬로키티 발판이 있다. 의자는 푸른색, 방석은 연분홍색, 경비실 바닥에는 가위와 전지가위가 색 바랜 신문지 위에 놓여 있다.


휴일을 맞아 온천욕을 하러 온 식구들이 여자 남자 팀을 가르고, 몇 시에 만나자 약속을 하고 제발 늦지 말라고 남자가 당부하면 당신이나 늦지 말라고 여자가 잔소리를 하고, 졸음이 덜 깨 눈을 비비는 아이가 있고, 이제 여탕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에 울음을 터뜨리는 사내아이도 있고. 그 뒤로 지난밤 해변의 숙취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얼굴로 연신 하품을 하며 입욕을 기다리는 사내들이 있다.


아니다. 사실은 사실이 아니다. 금호온천은 문을 닫았다. 텅 비어 낡은 건물과 색이 떨어져 나간 간판과 무너진 벽의 주차장과 경비실만 남아 있다. 주차장은 바로 옆 갈빗집 주차장으로 사용 중이고 지하 주차장 입구에는 객실용 욕조들이 굴러다닌다. 가장자리가 깨진 욕조는 살구꽃 빛이고 영업을 중지한다는 안내문이 붙은 경비실 달력은 2021년의 것이니 그즈음 문을 닫은 것 같다. 그 뒤로 해운대 지도가 붙어 있다.

텅 빈 온천 건물을 들여다본다. 입구는 주차장 쪽으로도 있고 도로변에도 있다. 창문은 사라지고 텅 빈 구멍이 층층이 이어져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 자물쇠를 채워둔 유리문을 열면 뜨거운 물 냄새가 날 것만 같다. 쌓인 먼지들이 수증기 같다. 웅성거리는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환취와 환청의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을까. 그 많은 시간 속을 출렁이던 온천물은 다 어디로 흘러간 걸까. 발 밑에 아직도 뜨거운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는 건데.


차가운 바다와 뜨거운 온천이라니, 전혀 다른 두 물길이 근접해 있다니 신기하기도 하다. 해운대 온천의 역사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연두를 앓던 여왕이 온천욕을 한 후 깨끗한 피부를 되찾았다는 일화도 있다. (부산일보, 240627 “가장 오랜 역사 동래 온천... 치병 온천 명성 [핫하다, 부산온천]) 그보다 훨씬 전 마을 사람들이 데우지 않아도 사철 뜨거운 물줄기를 알았겠지. 그 편리함과 효험을 알게 되었겠지. 소문이 마을 너머로 퍼져나갔겠지. 마침내 여왕이 행차하는 날은 얼마나 화려하고 분주했을까. 다들 여왕을 향해 온몸을 수그리고 절을 했겠지. 여왕의 쾌유를 기원했을 수도 있고, 여왕의 병증이 비밀이었을 수도 있다.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에 따르면 해운대 온천이 본격적으로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00여 년 전인 1920년에서 30년대로 추정된다. (부산일보, 240930 ”100년 전 해운대 온천 시추 사진 공개 [핫하다, 부산 온천]) 조선총독부지질조사소가 1925년 발간한 ’해운대온천조사보문‘에 담긴 내용인데 당시 서울 부호였던 아라이 하츠다로가 온천 발견권을 공식 획득, 사원 3명과 함께 ‘해운대온천기업합자회사’를 설립한다. 온천 지구의 가옥과 건축, 토지와 온천 관리를 하는 한편 온천호텔, 온천풀장, 해운각, 해운대 공중욕장, 순환버스, 농장을 운영하며 관광객 유치를 했다.

1923년 해운대온천 제1호 시추정 굴착 장면
1935년 개장한 해운대 온천 풀장. 현재 해운대구청 자리에 위치. 수영장, 온천탕, 연회장, 동물원, 탁구장, 정원 등 위락시설을 갖추었다.

2024년 해운대 엘시티에 도심형 온천(클럽디오아시스)이 개장한다. 래시가드며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노천탕에 몸을 담근 채 바다를 즐기고 있다. 바깥으로 봄여름가을이 흘러갈 때도 물속은 언제나 40도를 넘나드는 여름. 오래전 사람들도 이렇게 쌓인 피로를 풀었겠지. 숨 가삐 달려오던 일상을 접어두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 시간이니 몸도 마음도 편안해졌겠지. 오래전 여왕의 피부가 좋아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 같다.

클럽디오아시스

불안한 사건사고가 이어지는 날들, 우연에 기대는 안녕 속의 걸음들. 지나치게 과열된 몸과 마음을 쉬게 해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바쁜 일 끝나면 쉬는 게 아니라 바쁜 중 쉬는 시간을 미리 확보해야겠다. 새해 준비물은 따뜻한 마음. 나 자신을 대우해 주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고, 허락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준비해야겠다. 내가 행복해야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을 도와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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