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앉으세요."
두리번거렸다. 나를 향한 말이다. 0.1초 사이 맴도는 말은 왜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등등. 또한 이 자리를 패스해 드릴 사람을 찾는 분주한 눈동자. 그러나 다들 푸르다. 그냥 앉는다. 감사 인사를 하고 앉아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곧 내리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오늘의 내 착장은 갈색 양털 느낌의 롱 코트(지퍼 여밈) 청바지에 검정 숏 어그부츠에 마스크에 검정 메신저백, 흰 귀도리. 스캔을 해 봐도 노약자 정도는 아닌데. 내 착각일 뿐인가. 실눈으로 봐도 내게 자리를 양보한 그녀는 내리지 않는다. 조는 척하며 심란한 맘을 다독인다. 양보해 주면 앉아야지 뭐…
전철서 내린다. 마음은 늘어지고 걸음은 처진다. 환승버스 정거장은 텅 비었다. 한참 기다려야겠구나. 줄을 또 선다. 눈은 절반 감은 채 떼 지어 날아가는 비둘기들을 심드렁하게 보는데 누군가 말한다.
"나는 아가씨 뒤에 서야지!"
두리번거리는데 주위엔 아무도 없다. 아가씨라니. 오랜만에 듣는다.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이 아가씨는 즐겁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여 허리를 반듯이, 목을 반듯이 하고 선다. 행여 내 뒤의 분, 나를 아가씨로 봐주신 분께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약간(매우) 신경을 쓰면서.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거나, 아줌마라고 부르거나, 고양이라고 부르거나, 다람쥐라고 부르거나 나는 그냥 나일뿐. 존재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것을. 완전무결이면 좋겠지만 완전 유결의 생명체라는 것을. 그것으로 완전충분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