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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 + king

by 김박은경

산책은 두렵지 않아야 한다. 졸리지 않아야 한다. 피곤하지 않아야 한다. 위험하지 않아야 한다. 산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해가 나서 환한 시간을 고르겠지. 이른 새벽의 걸음이라면 출근이다. 그래도 걷다 보면 잠이 깨고, 해가 나온다. 낮이 길어지니 머지않아 봄이 오겠지. 봄이 오려나. 우리의 나라는 어떻게 되려나. 조금씩 좋아지기를.


생각을 지우면서 빠르게 걷는다. 마른나무, 군데군데 쌓인 눈, 녹으며 다시 얼기도 하고. 소금 알갱이만 보이는 길도 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아직 환하고, 르미나리에 조명도 환하지만 24시간 오픈이라는 김밥집은 어둡다. 불 꺼진 천국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김밥 천국의 주인공은 김밥이 아닐까. 김밥이 태어나 사라지는 장소이니 김밥의 천국 맞지. 걷다 보면 아무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웃어도 춥네.


걷는다. 걷고 있다. walking는 walk에 ing가 붙어 만들어졌지만, walk 자체가 king 아닐까. 걸을 수 있으면 살아있는 것이다. 걷기에 대한 바람을 갖고 있다면 살아있는 것이다. 걷기에 대한 절망을 갖고 있어도 역시나 살아있는 것이다. 두 발로, 한 발로, 지팡이를 짚고, 보조기를 밀고 어떻게든 걸어가고 있다면 자기 생의 왕이나 다름없다.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으면 왕이나 다름없다. 아니, 왕도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없으니 왕 이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뭔가 꼬이면 걸어야지. 글이 써지지 않으면 걸어야지. 생각이 넘치면 걸어야지. 화가 나면 걸어야지. 살이 늘면 걸어야지. 살기 싫어지면 걸어야지. 조금 고단할 정도로 걷고 나면 잠 안 오는 밤이란 없을 거고, 맛없는 음식도 없을 거고. 걷다가 우연히 만나는 장면들 속에 나를 위한 암시나 방편 같은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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