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색 사다리

by 김박은경

언니가 사다리를 가져갔다. 아버지 집 창고 구석에 있던 은색 이단 사다리. A자 형태로 스스로 선다. 오래된 그것은 시간의 더께를 잔뜩 뒤집어쓴 채 펴지기나 할까 싶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것으로 껌뻑이는 형광등을 교체하셨겠지. 장롱 꼭대기를 정리하셨겠지.


그날 저녁, 언니가 사진을 보내왔다. 사다리는 새 생명을 얻었다. 형부의 야무진 솜씨 덕분이다. 그 사다리로 언니와 형부는 어디를 오르게 될까. 유품으로는 아주 거대한 편이다. 진짜 은인 듯 빛이 났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사다리였다. 세상 많은 부모들이 그러하듯,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주며
자식들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오래된 사진을 들춰본다. 꼿꼿하고 당당했던 시절. 아름다운 엄마와 함께 선 사진. 두 분이 서로 기대어 빛나는 사다리로 계신다. 


우리가 처음 이사한 새집, 진짜 우리 집. 마루 아래로 동네가 내려다보이던 큰 창, 단발머리 언니, 기타를 든 큰오빠, 개구쟁이 작은 오빠, 까부는 나. 사진을 찍은 이는 아마 언니나 오빠였겠지. 그 검정 카메라는 아버지가 사 오신 니콘이나 캐논이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을 고르셨으니까. 그때는 그게 최고였다고 들었다. 


사다리는 위로만 오르지 않는다. 진창길에 쓰러지기도 하고, 그렇게 누운 채 사람들의 발을 젖지 않게 해주기도 해 준다. 아버지의 사다리는 무엇이었을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지금, 나의 사다리는 무엇인가.


어쩌면 '사다리가 되어주어야 하는 누군가'가 사다리의 버팀목이 되는 건 아닐까. 해야 하는 일들이 사다리는 아닐까. 우리는 각자 그 사다리에 발을 얹고 지금도 시간의 고도를 조용히, 묵묵히 오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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