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동창의 아버지가 또 한 동창의 시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것도 장례식이 끝나고 수일이나 지난 즈음이었다.
“왜 말 안 했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알려줬으면 당장 달려갔을 텐데...”
놀라고 미안한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늦은 조의금을 보냈고, 봄이 가기 전에 보기로 했다.
왜 알려주지 않았을까. 내가 힘든 때인 걸 알고 그랬을까. 그래도 힘든 일에 반드시 연락하기로 했잖아. 가족끼리 작게 모여서 장례식을 치루었다는데 그래도 너무 슬프고 아프다.
한편으로는 연락 못한 마음도 알 것 같다. 며칠 전 지인의 문자를 받았다. 봄이 가는데 잘 지내냐고, 앓고 계신 나의 아버지며 시부는 어떠시냐고 안부를 물어왔다. 답장을 쓰다 지웠다. 한 줄을 쓰고, 또 한 줄을 지우고... 결국 “잘 지낸다. 고맙다"는 말만 남겼다. 그 말이 미안해졌다. 점점 무거워져서 며칠이나 지나 늦은 문자를 보냈다. 긴 내용 중 일부를 옮긴다.
“왜 연락을 안 했냐고 하시겠지요. 몇 사람에게 하다가 말았습니다. 할 수가 없었어요. 사람들 만나는 게 너무 괴로웠습니다. 다정한 위로, 조문 그런 것들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몹시 아프기도 했습니다. 이제 5월 말이면 49일 즈음 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지 생각을 합니다. 살아계시다는 착각을 하지요. 연락을 드리려다 말고, 챙겨갈 물건들을 메모하다 말고, 좋아하실 음식들을 고르다 말아요. 오늘은 아버지 집을 정리하러 갑니다. 작은 세상에서 조그맣게 지내려고요. 독거하시던 아버지처럼요. 고마웠어요. 잘 지내세요.”
우리는 서로의 장례식 소식을 뒤늦게 전하고, 안부를 말로 꺼내는 일이 이상하게 어려워진다. 하지만 함께 한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극작가 오세혁이 <걸판> 20주년 공연을 펼치며 말하듯 '서로의 인생에 출연'하며 살아냈다. "우리는 20년간 연극을 만들어낸 것을 넘어서, 서로의 인생에 출연하며 20년을 함께 살아낸 것이었다. 연습실에서, 분장실에서, 술집 테이블에서, 병원 대기실에서, 장례식장 구석에서, 무대보다 더 많은 삶의 장면을 함께 견뎌냈다. 울어야 하는 순간에 함께 울었고, 웃어야 하는 순간에 함께 웃었다.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 주인공으로 남았다.” (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250508 조선일보)
고교동창들을 생각한다. 교복을 입고 떡볶이를 먹으러다니던 네 명의 소녀들. 졸업을 하고 대학을 가고 커피숍에서 경양식집에서 호프집에서 공연장에서 결혼식장까지. 서로의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고 들어주고, 말이 되거나 안 되거나 무조건 편들어주고, 고민을 상담해주고, 함께 분노하고 억울해하고 웃고 떠들고, 가끔은 경쟁도 하고 질투도 하고 이해도 하고 짜증도 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하고 오지 않을 것 같은 미래에 대해 농담을 했다. 자주 볼 때도 있고 일 년에 한두 번 겨우 만날 때도 있지만 우리도 서로의 인생에 주인공으로 남았다.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경조사는 몇 번쯤 될까. 우리 중 누가 가장 늦게까지 남아 먼저 가는 이를 조용히 배웅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