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 아버지의 안식년

by 김박은경

아버지의 1982년은 선명합니다. 사진이 아주 많아요. 영국에서 3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을 지내셨습니다. 그는 아주 젊고 당당하고 멋있습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떠난 길이었지만, 지금 보니 아버지의 짧은 안식년 같기도 합니다. 외롭고 힘든 날들이 아닐 리 없지만 박물관, 공원, 동물원, 왕궁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속엔 경탄과 생기가 가득합니다.

영국 여왕 일가를 찍은 사진도 있어요. 다이애나비는 만삭입니다. 여왕님은 정정하시네요. 동물원에서 찍은 사진들은 네 마리 새, 혼자 있는 곰, 어미의 젖을 빠는 망아지… 사진마다 아버지의 감정이 전해집니다. 외로움과 그리움을 그 생명들에게서 위로받으셨을까요.

사진마다 작은 메모들이 적혀 있습니다.

"이건 돌아가서 아이들에게 보여줘야지"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기억하는 아버지가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모르는 시간도 있었네요. 그 시간에, 저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저 멋진 버버리 코트는 아쿠아스큐텀 제품입니다.

영국에서 직접 사 입으셨겠지요. 그 옷은 오랫동안 집에 있었고, 한참 멋 부릴 때 제가 빌려 입기도 했습니다. 그 큰 옷을요. 하하. 소뿔로 만든 단추는 단단했고 빛이 고왔어요. 좋은 옷은 두고두고 사랑받습니다.


출장을 떠나는 아버지를 배웅하는 젊은 엄마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남편을 먼 타지로 보내고 아이 넷과 연로한 시어머니를 돌보는 일.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남편에게 편지를 쓰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막막하고 외로웠을까요. 그 시간, 아버지는 아이들이 잘 크는지, 공부는 잘하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겠지요. 그래도 휴일이면 카메라를 들고 좋은 곳을 찾아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셨을 테죠.


중환자실에 계실 때, 아버지는 영어로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아임 나인 투 이얼즈 오울드." 눈을 간신히 뜨고 손가락을 올려 몇 번이고 나이를 전하시던 아버지. 다른 영어는 제가 알아듣지 못했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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