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Allez), 아버지

by 김박은경

그와 그의 아버지가 걷는다. 구순을 넘긴 아버지는 이제 낮은 계단 하나도 힘들다. 평지로 돌아가자고 해도 거절하신다. 아들은 아버지의 팔짱을 단단히 끼고 반 걸음씩 발을 맞춘다. 그러고는 아이를 달래듯 명랑하게 외친다.


“아버지 알레! 그렇지, 알레알레! 잘하셨어요!”


‘가자’, ‘힘내’라는 뜻의 프랑스어 알레. 그들 부자(父子)가 공유하는 언어의 절반은 불어였다. 오직 둘만이 통하던 대화. 아버지는 거의 잊은 그 언어.


오늘의 아버지는 평생 운동을 거르지 않는 근육질이다. 아침이면 이불을 베란다에 널어 말린다. 양복을 입을 때면 나라에서 받은 훈장을 자랑스레 달고, 셔츠 소매의 커프스버튼을 채워달라며 팔을 내미신다.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식구들에게 "축구 봐라!” 호령하듯 전화를 돌리신다.


아버지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아내를 잊었다. 대신 빨래터에 있던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그리며 아이처럼 “엄마, 엄마” 울음을 터뜨린다. 산책을 나갔다가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며 겁에 질려 전화를 걸고, 젓가락질을 잊어 작은 새처럼 입을 벌린 채 밥을 받아 드신다. 주민번호가 틀렸다며 당신은 지금 정확히 일흔네 살이라 우기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릿해진 노인. 어제 다녀간 사람조차 기억의 저편으로 흘려보내는 분.


그럼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다. 물을 아껴 써야 한다며 세면대에 대야를 얹어 물을 받아 몇 번이고 다시 쓰고, 전기세 아끼려 한여름 에어컨과 한겨울 보일러를 기어이 꺼버리는 그 고집스러운 절약 정신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요? 아, 그랬구나. 그랬어요?”


아버지가 어떤 엉뚱한 이야기를 해도 아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낸다. 두 사람은 다시 한 걸음, 다음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자, 아버지. 다시 알레!”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각성 중독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