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스타 연대기는 권지용에서 시작해 이찬혁과 이희문에 닿아 있습니다. 권지용(GD)이 화려한 폭발력으로 하늘 위에서 반짝이는 '선망의 불꽃'이라면, 이찬혁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일상을 뒤틀어버리는 '구조적 설계자'입니다. GD가 압도적인 무드와 패션으로 "나를 봐!"라고 외칠 때, 찬혁은 동요와 일상 언어를 기묘하게 반죽해 "이런 건 몰랐지?"라며 뒤통수를 칩니다. GD가 불꽃놀이의 정점이라면, 찬혁은 정교하게 짜인 큐브 같습니다.
여기에 이희문이라는 파격이 끼어듭니다. 그는 박물관 유리벽 안에 갇혀 있던 민요를 끄집어내 짙은 화장과 가발을 씌우고 '지금, 여기'의 클럽으로 던져버립니다. 전통을 존중하되 결코 복종하지 않는 태도.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가장 퀴어(Queer)하고 펑키하게 번역하는 그의 몸짓은 관습이라는 벽에 유쾌한 균열을 냅니다. 충격을 주지요.
이들은 시대의 결핍을 채웁니다. 새 기준을 세웠어요. 스스로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습니다. 경계를 파괴했어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해냈습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내부 검열'의 스위치를 꺼버렸다는 점입니다. "남들이 어떻게 볼까?"라는 질문 대신 "내가 재미있는가?"라는 질문을 앞에 둡니다. 그 덕에 우리는 규격화된 아이돌이나 뻔한 발라드 대신, 낯설고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물 받습니다.
천재가 될 수 없을지라도 지향은 할 수 있겠지요.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집착의 재발견입니다. 남들은 금방 잊는 것에 유독 마음이 머물고 자꾸만 생각난다면, 그건 미련이 아니라 '단서'입니다. 그 집요함을 끝까지 따라가 보는 겁니다. 둘째, 이상함의 권리입니다. 내 머릿속의 잡생각이 부끄럽게 느껴질 때, 바로 그때가 힌트 아닐까요? '이상함'은 '독창성'의 미완성 상태일 뿐이니까요. 셋째, 출력의 용기입니다. 믹스는 누구나 하지만 출력은 용기 있는 자만 합니다. 당연한 것을 의심하고 일단 세상 밖으로 내던지는 겁니다.
천재성이 선천적인 것이라면 용기는 조금은 후천적인 것 아닐까요? 부디 용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