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배다리 우각로
4. 영화초등학교와 창영초등학교
영화초등학교
영화학교(영화초등학교)는 1892년 4월 미국 선교사 존스부인이 설립한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입니다. 구한말은 유교적 질서가 여전해서 여자들이 신학문을 배우기가 어려웠지요. 처음에는 존스부인 자신을 돕던 사람의 딸 한 명을 가르쳤고, 3년이 지나서야 세 명의 학생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생활비며 학용품까지 대주면서 인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고요. 영화학교에서는 일본말을 쓰지 않아서 일본 교육 당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고요. 1919년 3월 1일 기숙사 식당에서 ‘눈물의 연설’을 벌이며 3·1운동에 불을 붙이게 됩니다.
영화학교는 일제 정책에 의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관립학교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의식을 굽히지 않으며 걸출한 여성들을 많이 배출합니다. 유아교육 개척자 서은숙 박사, 이화여대 교육자 김애마 학장, 이대 예술대학장 김영의 여사, 영화배우 황정순 선생, 김활란 박사 등을 배출한 역사적인 장소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영화초등학교 본관은 사각형의 단정하고 단단한 건물입니다. 작고 아름다워요. 인천의 100년 이상 된 역사 탐방 및 문화재 관련 투어와 연계하여 야간조명이 설치되었다니 꽃 피는 저녁에 또 가보고 싶습니다.
창영초등학교
중구의 신흥초등학교가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였다면 동구의 창영초등학교는 순수한 한국인들을 위한 학교입니다. 순수민족자본으로 1907년 설립, ‘인천 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고요. 1912년에는 학생수가 348명에 달합니다. 영화초등학교와 이웃해 있는데 배다리 헌책방거리와 어울려서 인천 지역 교육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만세운동의 진원지입니다. 당시 3학년이었던(지금의 초등학교 3학년은 아닙니다. 1900년생으로 1916년에 입학, 1919년에 3학년이었으니까요) 김명진 선생은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교내 일경의 사주를 받은 교원들에 대항하며 항일투쟁을 주도합니다. 1919년 3월 8일 오후 9시, 김명진,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 등은 학교 건물 2층에 몰래 들어갔다가 미리 준비한 가위로 전화선을 끊어 경찰서와 연결된 통로를 차단했습니다. 주변의 조선인 가게들도 격문을 돌리며 동참하고요. 모두 옥고를 치르지만 엄혹한 시대의 용기 덕분에 좋은 날을 더 빨리 맞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창영초등학교 교정에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있는데요. 김명진의 묵직한 포효가 울려옵니다.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바탕한 의사발동이지 범죄가 아니다.”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상고문, 김명진
5. 인천 기독교사회복지관(여선교사 기숙사)
1885년 북장로교회 언더우드 선교사와 북감리교회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제물포항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기독교 포교가 시작됩니다. 인천의 성공회 내동교회, 내리교회, 답동교회 등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는데 그들의 현실적 고민 중 하나는 숙소 문제였습니다. 남자 선교사들에 비해 여자 선교사들은 더욱 불편했겠지요. 선교를 위한 의료 및 교육사업을 위해 1905년,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동구에 여자 기숙사를 짓습니다. 지상 2층, 지하 1층에 건평 142평짜리 여선교사 기숙사 옆에는 남선교사 기숙사, 아펜젤러 사택의 양관 세 채가 이 언덕 위에 삼각형의 정점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천 남구 학익동의 극동방송 사옥이 가족 단위 선교사들의 거주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독신 선교사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였다고요.
여선교사 기숙사의 내부 구조는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요. (TBS 시민의 방송, “선교사의 안식처-인천 구 여선교사합숙소”, 2018. 02. 5) 지하층에 보일러실과 창고, 1층에 여선교인 지도자의 교육장, 2층에 주방과 선교인들의 침실이 있었고요. 미국의 건물 양식을 적용한 붉은 벽돌의 외벽에 원래 지붕은 푸른색이었는데 지금은 검은색입니다. 폭설에도 눈이 쌓이지 않도록 한 북유럽 양식의 뾰족한 지붕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섯 가지 모양의 창문인데요. 처마 유무와 각 공간의 크기 및 용도에 어울리도록 모양을 달리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서원이나 사찰의 승방에서 볼 수 있는 쓸 용(用)자 모양이나 빗살무늬로 가장자리를 채운 창은 우리의 전통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설계자는 서양인이었지만 공사는 조선 사람들이 맡았기에 자연스레 접목되었다는 의견도 있고요.
“지난 해 11월 갬블홈에 입주했다. ...갬블홈이 제공하는 안락함에 대해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3명의 여선교사가 거주하기에 아주 적합한 공간이다.”(한국 여선교회의 연례보고서 1905년) 이 숙소에 대한 여선교사의 소감인데요. ‘갬블홈’은 건축 비용을 기부한 P&G사의 메리 겜블 부인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여름에는 서울과 평양에 있는 여선교사들이 휴가를 즐길 수 있는 휴양 공간이 되어주었다지요.
일제가 미국 선교사들을 적국의 국민으로 간주하고 탄압하기 시작한 1942년까지 이곳에는 수십 명의 미국 여선교사들이 거주했지만 선교사들의 강제 출국과 함께 문을 닫게 됩니다. 해방기를 거쳐 지금까지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는데요. 지금은 텅 빈 채 잠겨 있습니다.
기억에 의지해 이곳을 찾다가 조금 헤맸습니다. 이곳의 명칭이 단번에 들어오질 않더라고요. 여선교사 기숙사라고도 부르고 여선교사 합숙소라고도 부르고 기독교사회복지관이라고도 부르니까요. 저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에요. 이 건물의 명칭에 대해 ‘기독교사회복지관’과 ‘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의 명칭이 비슷해서 혼란이 일면서 문화재 관리 주체인 창영교회는 이 장소를 “구 여선교사 합숙소”로 변경하기를 요구한 바 있는데요. 건물 입구의 커다란 안내판에는 “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바닥동판에는 “여 선교사합숙소”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장소가 중요한 이유는 여선교사들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렛 헤스는 1913년부터 1940년까지 27년 동안 인천에서만 선교 사업을 벌인 분인데요. 인천 최초로 영화유치원을 설립하고, 교통수단이 부실했던 시기에 강화도를 비롯한 서해 도서 지역까지 작은 배를 타고 구호활동을 벌여 ‘헤스 부인’이라는 호칭으로 주변 주민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한 코스트럽(Alfrida Kostrup)은 부평 계양지방에서 의료사업 및 수해 구호활동을 펼쳤고 유아진료소를 개소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삶이 바뀐 소년소녀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나라를 잃고 전쟁이 나고 부모를 잃고 집을 잃고 힘들었을 시간을 버티고 견딜힘을 얻었겠지요. 새삼스럽지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