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박스에 담긴 편지들

by 김박은경

한 해는 세 번(그 이상)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1월 1일의 해돋이로 한 번, 구정 설날의 온기로 또 한 번, 그리고 정월 대보름의 넉넉한 달빛 아래서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습니다. 작심삼일(作心三일)의 허탈함도 이 세 번의 시작 앞에서는 너그러워집니다.


저희 집 옷장 속에는 낡은 쿠키 박스가 하나 있습니다. 그 안에는 리본으로 묶인 편지 뭉치들이 해를 거듭하며 켜켜이 쌓여갑니다. 매년 가족이 모여 한 해의 소망과 계획을 적는 작은 의식입니다.


촛불을 켜고 앉아 우선 발표를 합니다. 누군가는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나만의 길을 찾겠다"며 한 해를 분기별로 나누어 걷는 '느림의 미학'을 선언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올해는 성급해지겠다"며 두 달 단위로 목표를 쪼개어 몰입하겠노라 다짐합니다. <원씽(The One Thing)>과 <열 배의 법칙> 책을 소개하면서요. 누군가는 새로운 경험을 하겠다, 재밌게 살겠다고 하고요. 누군가는 동유럽 여행 계획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편지 속 내용은 모릅니다. 제 것에 반복되는 이야기는 온 식구, 일가친척의 건강에 대한 바람, 지향해가는 삶, 모두에 대한 감사 같은 것들입니다. 식구들 모두 편지 말미에는 비슷한 이야기를 적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글쓰기가 끝나야 비로소 우리의 진짜 한 해가 시작됩니다.


오늘 아침, 하늘에 걸린 반달을 보았습니다. 내가 보는 저 달은 지구 반대편, 포화가 빗발치는 전쟁터의 위태로운 하늘 위에서도 똑같은 모양으로 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편지에 꾹꾹 눌러쓴 '건강'과 '평온'과 '사랑'이라는 단어는 인류라는 거대한 가족이 공유하는 가장 간절한 기도문이기도 할 겁니다. 달빛을 타고 우리의 기도가 가 닿기를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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