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무균실에서 자라지 않으니까요

자녀의 ‘성(性)’이라는 낯선 영토를 마주하는 부모의 자세

by 김박은경

사랑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질병 같습니다. 자녀가 성인이 되어 누군가를 만나고, 깊은 정서적·육체적 교감을 나누기 시작할 때 부모의 마음에는 축복보다 앞서는 묘한 불안과 분노가 일렁이곤 합니다. 이를 단순히 집착이나 간섭으로 치부하기엔 그 바탕에 깔린 감정의 층위가 너무도 두텁고 복잡합니다. "좋은 일인데 왜 마음이 이토록 힘들까?" 스스로 묻게 될 겁니다.


영화 <겟 아웃>은 흑인 남성이 백인 여자친구의 집을 방문하며 벌어지는 기괴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이면에는 통제와 소유욕이 깔린 부모의 태도는 뒤틀린 분노로 변질되어 관객을 압도하지요. 우리네 드라마 속, 자녀의 연애를 강요하거나 결사반대하는 부모들의 모습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왜 남의 집 귀한 자식의 연애에는 관대하면서, 유독 내 아이의 ‘사랑’ 앞에서는 안전 요원의 날 선 감각을 세우게 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아이를 키우는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부모의 뇌는 '위험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최적화되었기 때문일 듯합니다. 자녀가 성인이 되었다고 보호의 스위치가 하루아침에 꺼질 리 만무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올 자녀의 외박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은, 부모의 무의식이 여전히 자녀를 ‘돌봄이 필요한 약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사랑 뒤편에 숨은 그림자를 먼저 봅니다. '상대방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일까?', '타오르는 호르몬의 폭죽 뒤에 원치 않는 결과가 생기면 어쩌나.' 부모가 필시 겪었을 이별의 통증, 배신감, 사회적 시선이라는 파편을 자녀 또한 맞게 될까 봐 대리 걱정에 미리 휩싸이는 것이지요.


여기에 ‘상실감’이라는 감정이 가세합니다. 내 품 안에서 어느 정도 통제 가능했던 존재가, 이제는 타인과 가장 은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으며 부모가 가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사실이 백 프로 반갑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이 무력한 서운함은 때때로 ‘화’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 자녀를 비난하거나 상황을 부정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사랑의 기쁨도, 육체적 환희도, 쓰디쓴 절망도 결국 자녀가 스스로 통과해야 할 필수 과정입니다. 이는 성숙한 성인이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수업료와 같습니다. 부모가 그 경험을 원천 차단하는 것은 자녀의 영혼이 단단해질 기회를 박탈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의 도 넘는 근심은 아마도 자녀의 심장이 여전히 자신의 몸 안에서 뛰고 있다고 믿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제 부모의 품을 떠나, 자신만의 인생이라는 거친 파도를 타야 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가 절대 넘어지지 않도록 길을 닦아주는 게 아닙니다. 만에 하나 사랑에 데고 관계에 지쳐 돌아왔을 때, 말없이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줄 수 있는 최후의 안전기지가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자녀의 사랑을 인정하고 그 영역을 존중하는 것은, 자녀를 온전한 독립 인격체로 대우하는 가장 고귀한 (거의) 마지막 양육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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