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허(凌虛) 송도의 여름(1)

by 김박은경

요번 여름에는 송도에 갑시다, 이렇게 말하면 피서구나, 송도(松島)라니 소나무가 많은 섬일 거라고 상상하겠지. 그러나 송도는 소나무와도 섬과도 무관한 곳. 기록 속의 송도가 있고 IFEZ의 송도가 있고, 잃어버린 송도가 있고 만들어진 송도가 있으니 송도, 라고 할 때마다 동음다의의 도시가 될 것도 같은데. 일단 가봅시다, 라고 그에게 말했다.


제목의 능허(凌虛)란 ‘허공을 가르다’라는 뜻으로 조망이 좋은 냇가와 호수 주변 누각이나 절경의 해안가에 붙여지는 명칭이다. 오늘은 신송도 도시역사관을 시작으로 송도라는 지명, 능허대와 송도유원지, (구·신) 송도역, 신송도 등의 장소를 돌아보았다. 구송도 신송도라는 이름은 행정구역상의 것이 아니고 사용자들의 편의에 의한 구분임을 밝힌다.


1. 도시역사관

1.jpg 연수구에서 송도 들어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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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신도시를 크게 조망하려면 가장 먼저 도시역사관엘 가보는 게 좋다. 송도만이 아니라 인천 전체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나는 여행을 갈 때마다 그 지역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곳엘 꼭 가는데 그렇게 하면 장소에 대한 미감이 선명하게 남곤 했다. 들뜬 마음으로 밀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센트럴파크 역 바로 앞에 있는 도시역사관에 도착했다. 1층 로비에는 코로나자동차와 크라운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다. 묵직해 보이는 검정 차체는 빛이 나고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해 보였다. 지금 대로를 달려 나가도 어색하지 않을 모습, 디자인에도 한 표, 외적 관리 상태에도 한 표. 아름다운 자동차다.


3.jpg 도시역사관 로비에 전시된 크라운자동차

도시역사관 전시관 쪽으로 들어갔다. 여기 거의 20년 만이야, 이름이 도시역사관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인천 와서 얼마 안 된 때였어. 어떻게 하면 이 도시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여기저기 돌아다녔지. 그때는 여기 전시물이 별로 없었어. 층별 구성도 지금과는 달랐지. 볼 게 별로 없어서 금방 나갔던 기억이 나네.


그런데 완전히 달라졌다. 이름부터 도시역사관이라니, 멋진 발상이다. 도시마다 이런 곳이 있으려나. 한 도시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한 채의 집을 짓고, 전시 물품을 모으고, 고증 과정을 거치고, 시대 순으로 정리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을 골라냈겠지. 이곳은 인천의 시공간을 졸여서 만든 진국 같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보고 느끼는 게 좋겠다. 인천에 처음 오는 사람,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 외국 손님들에게 소개해주고 싶다. 1층은 근대도시관, 2층은 인천모형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 근대도시관에서 인천은 어민들이 살던 작은 포구 ‘제물포’로 시작된다. 강제적인 개방 이후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조계지가 생기고, 식민의 시대가 펼쳐진다. 일제의 수탈과 월미도 유원지 개발, 인천역 앞의 개항장 거리, 홍예문 등이 사진과 그림으로 재연되고 있다. 기록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왜곡과 망각에 당하지 않게 해준다.


차이나타운 청일조계지 사진 앞에서 아이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사진 속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다. 아이들은 사진 속에도 있고 사진 밖에도 있고.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는 이미 살아 본 삶 속에 있는 것도 같고. 코로나가 끝나가니 전시관에 사람들이 많았다. 마스크를 한 초등학생들이 팀을 이루어서 설명을 보고 듣고 적고 있었다. 이런 체험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의미한 장소마다 다양하게 준비된다면,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되풀이해서 듣게 될 테니 실감나게 체화되겠지. 모를 때는 그냥 지나치게 된다. 조금 알게 되면 조금 더 바라보게 된다. 더 알고 싶고, 알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막대자석에 철가루가 달라붙듯 관심이 경험과 인식의 반경을 넓힌다.


2층 인천모형관은 완벽한 조감의 장소다. 인천 시내, 강화도, 영종도 등을 실감나게 찾아볼 수 있다. 매립으로 변화한 인천의 전과 후를 비교해볼 수도 있다. 매립의 역사를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세상에 없던 장소를 만들어내는 일은 분명 더 잘해보고자 하는 것이겠으나 수습이 불가능한 단점이 있으니. 사라진 장소에는 사라진 물고기가 있고 그것을 목숨 줄로 삼던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 매달린 가족들이 있을 텐데 그들은 이제 다 뭘 해서 먹고 살까.


※ 시티투어버스

4.jpg 인천시티투어 바다노선 2층 버스, 출처-인천시티투어 홈페이지
5.jpg 인천시티투어 가이드맵

도시역사관 앞에는 시티투어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버스는 바다노선과 레트로노선 두 가지가 있는데 바다노선은 아침 10시부터 한 시간 배차간격으로 일곱 번, 레트로노선은 아침 10시부터 한 시간 배차간격으로 여덟 번 운행된다. 비용은 성인 기준 바다노선 10,000원, 레트로노선이 5,000원, 통합의 경우 12,000원. 바다노선은 2시간 35분 소요, 레트로노선은 1시간 45분 소요. 한 번 발권으로 당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다. 타고 달리다가 지정된 곳에 내려서 한 시간 정도 놀다가 다음 차를 타면 된다. 하루를 다 잡아도 부족할 것 같다. 바다노선은 2층이 오픈된 버스였다. 가을이 오면 꼭 타러 오자.


<바다노선>

센트럴파크 → 송도컨벤시아 → 인천대교 경유 → 왕산마리나 → 을왕리해수욕장 → 파라다이스시티 → 인천국제공항 → G타워 → 아트센터인천 → 센트럴파크


<인천레트로노선>

센트럴파크 →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 → 신포국제시장(답동성당) → 경동길 경유 →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배다리 책방거리) → 화평동냉면거리(자유공원) → 인천역(차이나타운, 동화마을) → 아트플랫폼(하버파크 호텔) → 송도컨벤시아 → 센트럴파크


2. 송도라는 지명

6.png 인천에서 송도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 자료, 매일신보. 1926년 12월 16일자, 출처-인천일보


7.png 1936년 발간된 ‘경승의 인천’의 송도유원지 일대를 표현한 페이지, 출처-인천일보

송도는 부산에도 있고 포항에도 있고 청진에도 있다. 인천의 송도라고 하면 두 곳이 떠오른다. 한 곳은 연수구 인천상륙작전기념관과 송도유원지와 송도기차역(폐역이 된)이 있는 곳, 그러니까 옥련동 전부와 동춘동 서부 일대가 해당된다. 또 다른 한 곳은 IFEZ라는 로고가 자주 보이고 현대적이고 미래적인 거대 빌딩숲을 이루고 있는 송도동 일대가 해당된다. 전자를 구송도, 후자를 신송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정작 ‘송도’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은 불과 100년 남짓이다.


구송도로 불리는 곳의 원래 이름은 옥골(玉洞), 독바위(瓮巖), 한나루(漢津), 큰앰(大岩) 등이었다. 조선시대 인천도호부 먼우금면에 속했던 곳으로 1914년 조선총독부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 경기도 부천군 문학면 옥련리가 되었다. 1915년 만들어진 ‘문학면 지지조서’에 의하면 옥골에 21호 109명, 독바위에 46호 260명, 한나루에 24호 116명, 큰앰에 37호 203명이 살았다. 1936년 부천군에서 인천부로 편입, 일본식 지명인 송도정이 붙었고 이때 능허대도 송도라는 지명에 희석된다. (먼우금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능허대와 함께 다시 이야기하겠다)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행정구역 폐합 정리를 실시한다. 이때 군 이름 97개, 면 이름 1834개, 리 동 이름 3만 4233개가 사라지고 1만 1000여 개의 지명이 새로 생겨난다. 이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뽑고 식민통치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해방 후로도 그 이름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그날의 쇠말뚝은 좀처럼 뽑히지 않는 것 같다. 돈도 들고 힘도 드는데 굳이 바꿀 게 있나, 하는 인식도 있는 것 같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말들도 하고, 그런 게 뭐 중요하냐고도 하는데 그렇다면 뭐가 중요하다는 것인가. 진실은 단단한 것, 그 위에 세워진 것만이 오래도록 바로 설 수 있을 텐데.


송도라는 지명의 유래는 일본 군함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일본의 유명한 휴양지 마쓰시마(松島)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후자 쪽이 더 우세하다. 마쓰시마는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 만에 위치한 해안 관광지로 소나무가 무성한 작은 섬이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고 계절마다 아름다워서 예로부터 일본의 3대 명승지로 유명한 곳이다.


일제가 식민의 장소들을 자신의 나라에 있는 지명으로 새로이 부르면서 한껏 제 나라의 분위기에 취했다는 건데. 마치 그곳인 것처럼,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의도했다는 건데. 그렇게 방자한 소유욕이 없다. 새로운 이름이 지어지며 원래의 지명에 깃든 이야기도 정신도 마음도 사라지게 된다. 이름의 상실은 장소의 상실과 다르지 않다. 제 이름으로 부를 때 다시 돌아오고,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앞서 말한 우리나라의 ‘송도’라는 지명들은 모두 일제 때 지어진 것이고 소나무와도 섬과도 무관한 곳이라고 한다.


온통 바다였던 송도동에 1994년 9월 10일 송도해상신도시 사업이 시작된다. 엄청난 매립이 계획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노태우 정부의 수도권 200만 호 건설계획에 따라 인천시는 송도해상신도시 조성계획을 발표, 2010년까지 여의도 23배 넓이에 인구 25만 규모로 바다 위 신도시 조성을 계획. 1994년 첫 매립 후 지금까지 매립공사가 한창이다. 2003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며 그 가치가 급상승하게 된다.


해안선이 굽은 정도를 수치로 환산한 값을 ‘굴곡도’라고 하는데 수치가 클수록 해안선이 복잡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우리나라는 서해안의 굴곡도가 컸는데 1990년 9.70 대비 2022년 5.24로 큰 폭으로 줄었다. (조선일보 2022. 07.12) 서해안의 갯벌을 막는 간척사업이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서해안이 남해안보다 더 단순한 모양이 되었다는데 송도가 큰 역할을 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송도는 부재하던 공간이었다. 이름도 장소도 전무하였다. 그저 갯벌이었고, 바다였고 그마저 그 이름이 아니었다. 세상에 없는 장소라고 생각하니 아련하고 어지럽다. 신송도를 걸을 때면 물결 위를 걷는 것만 같아서 다리가 지느러미 같고 허공이 수중 같다. 우리는 아가미를 벌려 호흡을 하고, 여기저기 반짝이는 비늘들이 떨어져 있고 말소리는 아득히 느껴지고 햇살은 아득히 먼 것만 같고.


3. 능허대

8.jpg 동춘역 역사 벽면의 그림으로 만난 능허대
9.jpg 송도유원지 개발 전 능허대에서 바라본 송도의 모습, 출처-인천일보
10.jpg 능허대공원에 조성된 능허대
11.jpg 능허대 위 정자
12.jpg 능허대터 표지석
13.jpg 능허대공원 내의 백제시대 배 모형

능허대는 동춘역 역사(驛舍)의 벽화로 처음 만났다. ‘능허’가 무슨 뜻인지, 비슷한 버섯 능이만 맴돌면서 궁금했던 차에 가보게 되었다. 백제의 사신들이 중국으로 출발할 때 환송하던 장소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잘 모르면 멀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옥련동 능허대공원을 찾아가는 길은 멀었고, 유동인구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능허대를 찾아 같은 자리를 몇 바퀴 돌고서야 붉은 깃발 끄트머리를 발견했다. 깃발 밑으로 목선 한 척이 버티고 있었다. 맨 땅을 이고 서있는 배라니! 그곳이 능허대터였다. 아파트단지 바로 옆이다. 능허대공원, 능허대지, 능허대터, 능허대 모두 한 장소다. 매립되어 그 자리만 남은 경우 지(地) 혹은 터라고 부른다.


능허대를 이야기할 때면 ‘삼호현’고개가 등장한다. 삼호현은 인천 읍내 쪽에서 송도 해안으로 나올 때 이용하던 고개인데 지금의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에 해당한다. 많은 전설이 전해지는데 고갯길 이름만 해도 삼호현, 삼해주현, 사모현 등이 있다. 발음에 따라 사모지 고개, 사모재 고개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렇게 사연이 많고 이름이 많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삼호현’ 전설이 깃든 것은 백제 시대 뱃길로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지금의 옥련동 능허대 공원 부근 한나루에서 배를 타기 위해 넘었던 데에서 연유한다. 당시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은 지금 남동구 만수동의 ‘이별을 하는 고개’라는 뜻의 별리현을 거쳐, 삼호현을 넘고 한나루에 도착했다. 그들을 배웅하러 온 가족들은 별리현에서 헤어져야 했다. 헤어지는 가족들은 서로를 세 번 불렀다고 한다. 잘 다녀오라고, 건강하라고, 사랑한다고 했을까.


‘삼해주현’ 전설은 문학산 서쪽 기슭에 있는 고개 위 큰 바위에서 시작된다. 바위에는 어찌된 일인지 물동이처럼 생긴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구멍에서 정월 해일(亥日)에 빚어 마시는 삼해주라는 술이 넘쳐 흘러나왔다고 한다. 고개를 넘는 나그네는 누구든지 삼해주를 한 잔 받아 마시고 갈증을 풀었는데, 절대 한 잔 이상 마시지 말라는 금기사항이 있었다. 그런데 한 사내가 연거푸 몇 잔을 욕심내자 바위 구멍의 술이 말라버렸고, 이후로는 아무도 그 술맛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사모현’은 사모지현이라고도 하는데 이별의 안타까움을 표현한 전설이다. 떠나는 사신들의 뒷모습이 고개만 넘으면 소나무 숲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어 가족들이 못내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고개라고 해서 그리 불렀다. 당시 중국에 간다는 것은 멀고 험한 일이었겠지. 떠나는 당사자나 남은 가족이나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14.jpg 먼우금로

연수구를 지날 때면 먼우금(遠又今)이라는 지명을 만날 수 있다. 먼우금은 지금의 옥련동, 동춘동, 청학동, 연수동 일대를 가리킨다. 청량산과 봉제산이 이어져 바다를 품에 안은 지역 먼우금, 송도는 먼우금(면)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먼우금의 유래는 옛날 문학면에서 먼우금면으로 들어오려면 뱃길로 4~500 미터는 되는 거리를 따라 10리 이상 돌아 걸어와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멀고도 가깝다고 먼우금이라 불렀다고. 또한 이 지역의 산세가 머리에서 뻗쳐 내려오다 팔이나 다리가 오금처럼 휘어 오므라져서 ‘먼오금’이라 불렀던 것이 먼우금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다른 설화로는 능허대에서 사신들이 배를 타고 중국대륙으로 드나들 때 유래한 것으로 ’떠날 때는 먼 길이나 이곳에 다다르면 갈 길이 가깝다‘는 뜻에서 먼우금이라고도 했다. 사연이 많은 이 지명이 사라진 것은 1937년 일제에 의해 ‘송도정(松島町)‘으로 개칭되면서이다.


본격적으로 능허대 이야기를 해보자. 바로 이곳으로부터 고대 해상교역로가 열렸다. 중국과의 해상교역로 출발지점으로 능허대가 이용되었고. 여기서 출발한 배는 서해를 건너 산둥반도의 등주(登州)와 래주(萊州)를 오갔다. 한나루와 산둥반도를 잇는 길이 중국으로 가는 최단거리였기 때문이다. 근초고왕 때 사신을 진에 보내 조공을 했고, 당시 수출품은 해물, 금포(錦袍-비단옷), 과하마(果下馬-조랑말의 일종, 과일나무 아래를 지나갈 수 있는 키가 작은 말, 다리가 짧고 튼튼해 보통의 큰 말보다 무거운 짐을 나를 수 있고, 산악 지형에서도 잘 넘어지지 않았으며, 지구력이 뛰어나고 성질이 온순한 편이라고). 금갑(金甲-금속으로 만든 갑옷), 의장용 도끼 등이었고 수입품은 서적, 약재, 도자기류 등이었다.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배는 백제 전성기였던 근초고왕 27년(372년) 때 능허대에서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중국과 통교하던 백제사신선을 복원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물론 축소된 사이즈로. 귀중한 물건과 소중한 사람들을 싣고 떠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멀미가 날 테니 사람도 동물도 고역이었겠다. 능허대에서 중국까지는 며칠이나 걸릴까. 해야 할 일들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이국의 물건들을 또 잔뜩 실었겠구나. 능허대에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식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겠지. 다시 만나는 자리가 반갑고 행복하여 뱃길의 고단함도 잊었겠지. 만에 하나 풍랑이나 해적이라도 만났다면, 돌아오지 못하는 소식만 남겨진다면 그리워서 울며 이곳저곳 헤매 다니는 이들이 많았겠구나. 넋을 기리는 진혼굿도 열렸겠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을 나무며 바위가 여기 어딘가에 있겠지. 그날의 기쁨이며 슬픔들을 몸피 가득 새겨두고서.


능허대는 옥련동 해안가 바위를 향해 솟아있는 평평하고 너른 바위인데 어른 30여 명이 앉을 정도의 크기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인천의 문학산과 함께 중요한 장소로 인식되었다. 청량산 한 줄기가 바다에 다다라 절벽을 이루는 듯 하다가 다시 솟아 섬 모양을 이룬 곳이라는 설명이 있다. 풍광이 수려하여 수많은 시문이 전해오는 곳이고. 해상교역로의 임무를 마친 능허대는 대표적인 명승지가 되었으며. 양반 문인들은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세상의 어지러움을 잊곤 하였다고.


능허대의 기암 전설도 빠지지 않는다. <인천부읍지>에 의하면 백제의 사신이 중국으로 떠날 배를 기다리는 동안 한 기녀와 정이 깊어졌는데, 사신이 출발하게 되자 이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한 기녀가 능허대 인근 바위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죽은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 바위를 기암(妓巖)이라고 불렀으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별나게 생긴 지형에 이야기를 만들어 전하는 일은 그곳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능허대는 송도의 시원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능허대는 해상교역로가 아니라 어장으로 남아있게 된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 권시(權諰), 「탄옹집(炭翁集)」의 <능허대>는 다음과 같다.


가는 벼랑으로 나 있는 오솔길

넓은 모랫벌에 끊어진 언덕

물은 땅을 갈라 무너뜨릴 듯

하늘은 파도를 치고 받는구나

푸른 바다는 산을 밀어내며 드넓은데

청산은 바다를 밟고 떠있네

긴 바람이 속세의 잡념을 몰아내니

먼 곳의 섬에 신선의 배가 나오네

-권시(權諰), 「탄옹집(炭翁集)」의 <능허대>


15.jpg 능허대 실경산수화, 국립인천해양박물관 소장, 출처-경인일보

조선 후기 능허대 일대의 실제 풍경을 그린 산수화를 만났다. 그림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멀리 있는 섬들이 그려져 있고, 가까이는 사신들이 사행을 떠나기 전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왼쪽의 문구는 ‘능허대춘호반입(凌虛臺春湖半入)’이라고 능허대에 봄의 조류가 반쯤 들어왔다는 뜻.


능허대는 1950년대까지 인천의 대표적 유원지였으나 해변은 매립되고 주거 시설과 도로가 들어서면서 1955년에 세운 표지석과 1988년에 조성된 연못 등만 남아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능허대 해상은 송도국제업무지구로 바뀌었고 인천대교와 인천공항의 건설로 새로운 국제교류지대로 탈바꿈하였다.


송도국제도시가 만들어진 갯벌은 원래 이름난 조개명산지였다. 어촌계에 여인들만 1,300여 명이 조개만 전업으로 채취하였고 연간 수백억 원의 생산고를 올렸다. 백합, 모시조개를 주로 잡았고, 동죽은 볶음이나 건제품 용도로 까서 팔았다. 갯벌 10 리까지 조개가 서식하고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노폐물이 씻겨나가 깨끗하게 유지되어 조개 채취의 최적지로 꼽혔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옥련동은 특히나 조개탕이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인천이 낳은 미술사가 고유섭의 수필 속 능허대를 보고 가자.


능허대는 인천서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한 10리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모래섬이나 배를 타지 않고 해안선으로만 걸어가게 된 풍치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항구에서 보이는 바다와 달라서 막힘이 없다. 발밑에는 출렁대는 물결은 신비와 숭엄과 침울을 가졌다. 편편이 쪼개지는 가을 햇볕은 나의 정신을 맑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고유섭, 「애상의 청춘일기」(1934)


연수구에서는 ‘능허대문화축제’를 활발히 개최하였는데 코로나로 잠정 중지되었었다. 2022년 올해는 열리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는데 코로나 재확산이며 원숭이 두창 바이러스 등 걱정스러운 뉴스가 들리니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백제의 바닷길에서 휘날렸을 붉은 깃발이 오늘의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시간이 시간과 이어지고 이야기가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고여 있는 연못물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고, 뿌연 그 속에 거북이며 자라 같은 명이 긴 짐승들이 떠다니고 있다. 여행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공항처럼 적적한 고요가 밀려들었다.


16.jpg 3D기법으로 제작한 능허대 추정도와 한성백제 당시 동진 남조와의 사신 왕래길, 출처-인천일보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능허대에 실감을 더해주는 사진을 만났다. 3D기법으로 제작한 1600년 전 능허대다. 간척사업으로 사라졌던 옛 지형을 1969년 찍은 항공사진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되살아난 능허대에 관한 기사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2019.10.13. [인천문화읽기] “최첨단3D 기술로 되살아난 1600년 전 능허대” 인천일보)


백제 근초고왕은 372년 중국 동진과 통교를 시작,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까지 수교가 계속되었는데 사신들은 중국까지 배를 타고 갔고 그들이 왕래하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 바로 지금 인천 연수구 옥련동 능허대이다. 당시 한반도의 정세는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고, 중국 또한 남북조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백제는 육로를 이용할 수 없어서 능허대 밑에 있던 한나루를 출발하여 산둥반도의 항구에 이르는 해로를 활용했는데 능허대가 있던 자리는 남조에서 온 사신들이 귀국할 때 배가 출항하기를 기다리기에도 좋고, 그들을 배웅하는 백제의 관원들이 멀어져가는 배를 지켜보기에도 적당한 위치였다.


또한 능허대 동쪽으로 이어지는 평탄한 ‘미(未)고지’가 청량산 낮은 곡부지역과도 연결되고, 일부 연구자에 의해 제기된 백제시대 교통로 루트와도 일치하여 능허대가 선박 기능과 함께 사신 행렬의 출발과 도착지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유추를 할 수 있다.


능허대는 서해안에 접해있는 돌출된 구릉으로 서해안과 내륙 모두를 조망하는데 탁월한 지형 조건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포구와 선착 장소로서의 기능보다는 경관지대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선착장으로서의 장소는 능허대에서 동쪽으로 약 300미터 정도 떨어진 구릉 지역 일대가 유력하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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