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획득과 중첩되는 반영들

by 김박은경

싫어도 너무 싫다고 떠들었는데 나 좋아하네, 여름. 좋아하게 되어버렸네. 왜냐고 묻는다면 극단의 감각, 분투하는 자세, 숨김없는 지향이라고 말하려다 보니 어느 계절이 그렇지 않을까. 섣부른 호오의 판단은, 결론은, 확언은 반드시 어리석은 짓. 자극에 대한 감각 기관들을 활짝 열어둔 채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것이 이 여름의 우연한 획득.


1. ‘안’이라는 말


‘안’은 시작, 기본, 바닥. 그곳에는 언제나 혼자가 있고, 은밀이 있고. 가장 잘 알 것 같지만 모르겠고. 가장 편안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고. 언제나 향하고 있는 기분.


복어회를 먹는다. 복어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을까. 살과 뼈와 내장과 독(도 남아 있을까). 최고의 요리사들은 복어 살점에 최소의 독을 남겨둔다는데, 입술이 짜릿해질 정도라는데, 죽음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준다는데. 청화 접시에 놓인 습자지처럼 얇은 복어 살점을 향해 젓가락을 내밀 때면 여기 한 점의 죽음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닌 것 같고. 복어는 다촉수납작벌레를 먹고, 그것의 맹독을 제 것으로 만들어 알을 지킨다. 독으로 이어지는 대대손손의 가호. 나의 안에는 무엇이 있나. 무엇으로 나를 지키고 있나.


어느 오후에는 다친 손가락에 놀라 병원으로 달려간다. 사거리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리를 저는 여인이 걸음걸음 서두르는 동안, 상처를 심장보다 높이 하려고 애쓰는 동안, 통증이 미세한 바늘처럼 찔러대는 동안, 등골이 서늘해지는 동안. 노란 꽃무늬 장바구니에 담긴 대파 끄트머리, 흰 비닐봉지 속 랩핑된 붉은 살덩어리, 검정 비닐봉지 속 과자 봉지와 맥주 캔 두어 개. 보드를 타는 아이의 노란 헬멧과 푸른 유모차에 앉은 흰 강아지, 커피를 왈칵 쏟는 사람의 주변으로 번지는 커피 향과 뜨거운 열기와 우디 계열 향수 냄새를 지나는 동안.


지혈을 돕던 간호사의 손에 붉은 방울이 둥글게 떨어진다. 작은 꽃처럼 그 열매처럼 그 손등에 잠시 머무는데 아플 겁니다, 조금 참으세요. 의사는 손가락에 마취 주사를 놓는다. 지혈 탓인지 손가락은 잔뜩 부풀어 남의 것인 듯 무감각해지고. 낚싯바늘 같은 것이 살을 낚는 듯 아니 뚫고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묶고 끊기를 되풀이하고 파상풍 주사와 염증 주사를 맞고 약국 들렀다가 집으로 가는 길을 따라 해는 지친 듯 떨어져 긴 하루가 끝나가는 동안.


눈을 뜰 수 없이 강한 햇살, 무너질 듯 출렁이는 나뭇잎 위로 아래로 옆으로 이어지는 나뭇잎들, 하늘 가득한 구름, 저쪽으로 날아가는 새들, 쉬지 않고 흔들리는 나비와 가끔의 잠자리. 차창을 내리기 전까지 내부는 완벽하게 차갑고 고요해 도착하고 싶지 않다. 도착 전이 좋다. 사랑하기 전, 만나기 전이 더 좋다. 과정으로 들기 전, 기다리는 그 ‘안’에 모든 것이 있다. 관찰자의 자세로 잠시 안전하고 쾌적하다. 약간 비겁하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


차들이 오른쪽으로 약간씩 비켜 가며 달린다. 바닥의 검은 저것은 새 혹은 고양이 혹은 쥐 아마도. 눈을 감고 싶으면서도 더 크게 뜨고 싶은 순간 검고 희고 붉고 작은 어떤 짐승의 흔적.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한 쌍의 패턴이 생을 이끈다지만 어떤 죽음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들이쉬다 말고 내쉬다 말고 덜커덕, 기요틴이 내려오는 건 아닐까. 허기진 상태였겠지, 목이 말랐겠지. 누군가 비명을 질렀을까, 눈을 질끈 감았을까, 침을 뱉었을까. 운전하던 그는 못 본 건지 못 본 척하는 건지 고요하다. 운전대 위의 희고 긴 손가락, 길어지는 머리칼. 짙어지는 수염 자국, 황토색 안경테. 말하지 않아도 편안해지는 이 상태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렸다. 서로의 안을 다 알 것 같은 오해에 이르기까지.


사랑은 타인을 향한다. 사랑은 타인의 약함 가운데서 타인을 향한다. 여기서 약함이란 어떤 속성의 열등한 정도를 나타내지 않으며, 나와 타자에 공통된 규정의 상대적 부족함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속성들의 현시에 앞서, 그 약함은 타자성에 타자성의 자격을 준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타인을 위해 두려워하는 것이고, 타인의 약함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 약함 속에서 사랑받는 이인 연인이 여명 속에서처럼 몸을 일으킨다. (...)

애무는 찾고, 애무는 파헤친다. 이것은 탈은폐의 지향성이 아니라 탐색의 지향성이다. 즉 비가시적인 것으로 나아감이다. 특정한 의미에서 애무는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러나 사랑을 말하지 못하는 무능력으로 고통받는다. 애무는 이 표현 자체에 대한 허기를, 끊임없이 커 가는 허기 가운데서 갖는다. 그러므로 애무는 그 자신의 한계보다 더 멀리 가며, 존재자 너머를 향하고, 미래까지를 노린다.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그린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안이 되고 싶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수록 더 그렇게 하고 싶다. 사랑의 행위가 끝나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겠지. 아무리 사랑해도 하나가 될 수 없고, 표피를 뚫고 들어갈 수도 없고, 삼켜버릴 수도 없고. 등 돌려 잠든 척 울음과 한숨을 참을 때도 있겠지. 사랑은 본시 절망에 이어져 있다. 불능에 이어져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랑을 포기할 수도 없을 거야.


안이라는 장소, 안이라는 마음, 안이라는 상태, 안이라는 지향. 바깥에 있을 때면 안으로 들어가고 싶고, 안에 있다 해도 더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고. 그러다가 변덕스럽게 바깥으로 나오기도 하고. 안이면서 안이 아니라고. 안이 아니면서 안이라고 우기기도 하면서. 안의 안에 닿게 되면 그곳 또한 무엇의 안일 수도 있는데.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또다시 확인하게 될 것도 같은데.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안’이 ‘아니’와 닿는다는 인식. 안이라고 믿는 장소가 정말 안인지 의심하면서. 안에서 더욱 안으로 향하다 보면 텅 빈 장소에 가 닿을 수도 있을 텐데. 고요할까, 조용할까, 어두울까, 잠 같을까. 배경은 코로나시대의 버스, 등장인물은 승객들이었고. 안과 밖, 혹은 안과 더욱 안, 이해와 오해, 내지르는 발화와 파고드는 탄식에 대해서도. 순간들이 확대되며 의도가 상충되고 충돌하는 카오스에 대해서도.


안에서 안으로 이미 안인데 아니라니 얼마나 안이라야 안인가, 안에 안이 있기는 있나 아무래도 아니라고 찾을 수 없다고 찾지 말라고 참을 수 없다고 참지 말라고 그러니까 그토록 간절하다면 반드시 없을 거라고 그러면 안에서 안으로 이어지는 리드미컬한 과정이라는 걸까 안을 향하는 지리멸렬한 습관이라는 걸까, 안이라니까 아니라니까 뒤채고 흔들고 어지러워 (...) 기침이라도 터지는 순간이면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러면 어딘가 더욱 안이 있다는 건데

-시집 『사람은 사랑의 기준』 중 「안」 부분, 여우난골


실밥을 푼 손가락은 어디 닿기만 하면 다시 출혈이다. 이렇게 얇은 껍데기 속의 몸이라니. 그러나 비는 나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햇살도 나를 통과하지 못하고. 눈과 바람도 나를 무너뜨리지 못하니 나는 충분히 강한 걸까. 나의 안에는 무엇이 있기에 나를 버티는 걸까.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하는 지금은 태풍의 중심이다. 느리고 강한 바람이 국토의 정중앙을 통과한다는데. 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여기저기 창문을 닫고 조금 더 안으로.


2. ‘등’이라는 말


내가 기대는 내게 기대는 내가 끌고 다니는 나를 밀고 다니는 나만의 사각(死角)은 등, 돌아볼 때마다 달라지고 변하는 것 같은 미혹(迷惑).


사람들은 쇼윈도를 흘긋 보며 지나가고 쇼윈도 속 사람들은 그 모두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그들이 사라지도록 고개를 돌릴 줄도 모르는 채. 작은 배와 손에 쥔 노는 낡아서 끄트머리가 부드러워지고. 여인들은 옅은 흑백 아니 그냥 흑백은 아니고 진흙 빛이 스며든, 시간이 만들어낸 빛에 가깝고. 사진을 찍습니다, 여길 보세요, 여기요. 하는 순간 플래시가 터졌을까. 그렇게 찍은 사진을 그들은 보았을까. 사라진 종족의 마지막쯤 되었을까. 어떻게든 살아남았을까. 어떤 언어를 썼을까. 사진을 찍은 자와 소통은 되었을까. 찰칵, 한 번만, 손으로 표정으로 몸짓으로 설득했을까. 콜라라거나 담배 같은 것을 사례라며 건넸을까. 빈 콜라병이며 빈 담뱃갑이 진기한 기념물이 되어 작은 선반 위에 놓여 있었을까. 느린 향기며 얼룩들이 그 순간을 불러냈을까. 이방인들이 줄지어 들어오면서 사진 정도야 얼마든지 찍어줄 수 있는 흔한 일이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한 장의 사진이 여기에 있다. 커다랗게 확대되어 액자에 담겨 매장 쇼윈도에 있다. 그녀들의 등 뒤로 빛나는 해는 지금 이곳에서도 빛나고, 저 강물은 아케이드 분수대까지 이어지고, 쇼윈도 그녀들의 풍경 위로 건너편 보석 매장이 비치고, 그 사이로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비치고 모두가 순하게 중첩되고 반영된 채 만들어내는 기묘한 풍경의 이 순간은 연속 촬영되는 점층의 우주 같고. 이 겹침을 사진으로 찍는다면 그 사진을 언젠가 누군가 보게 된다면 이야기들은 더욱 켜켜이 쌓여 있겠지. 그 층이 두터워 무엇도 파고들 수 없겠지.


열중하는 사람의 구부정한 등 뒤로 내려앉는 시간의 하중. 지난 시간이 사건이 기억이 구술이 쌓여 무거워 휘어지는 등은 두 번 다시 펼 수 없겠지. 등 뒤의 세계는 절대 볼 수 없는 곳. 전향하는 세계는 나를 포괄하며 등 뒤로 밀려나 또 다른 것들의 뒤가 될 텐데, 돌아보면 실제가 아닌 세계가 환시처럼 펼쳐질 텐데. 등 뒤는 가깝다기보다는 멀다기보다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 아니 무한의 영원까지 펼쳐질 정도.


등은 밀착한 배후가 되어 나를 지키는구나. 나를 대신해서 바람을 맞고 빛을 맞고 짐을 지고 아래로 밀리는 중력의 하중을 나누어 짊어지는구나. 볼테르는 연인의 벌거벗은 등을 책상으로 삼았다지. 그 여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달콤한 후희라고 느꼈을까. 쓰디쓴 모욕이라고 느꼈을까. 무슨 미친 짓인가 했을까. 지금 내 등에서 무엇을 썼어요? 물으면 구겨진 종이 위로 어지러운 글자들이 만들어낸 사랑스러운 요철을 더듬으며 나른하게 읽기 시작했을까. 늦은 오후의 햇살은 커튼 사이로 스며들고 바람은 야생화 향기로 가득했을까. 그는 특별한 글을 쓰기 위해 평범한 사랑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등이 가장 에로틱하다는 선생님이 기억난다. 여인의 최고 에로틱이 무엇인가 하는 토론에 손도 나오고 가슴도 나오고 허리도 나오고 발목도 나오고 목덜미도 나왔는데 등이라니, 상상하다가 동의하고 싶어 졌는데. 스스로는 볼 수 없는 부위를 누군가 바라보고 있다면 불쾌할까, 흥분될까. 시각이 오히려 눈을 가리는 건 아닐까. 그래도 다행이다. 등만 돌리면 외면할 수 있으니까, 멀어질 수 있으니까. 서로의 등은 서로를 가르는 명확한 경계, 그것으로부터 존재와 부재가 비롯되겠지. 돌아서는 사람의 등은 보고 싶지 않아. 그냥 뒤로 걸어가야지, 당신도 뒤를 향해 자꾸자꾸 걸어 나가요.


눈앞의 세계가 광장이라면 등 뒤의 세계는 밀실이 될까. 광장과 밀실은 서로의 역할을 바꾸기도 하겠지. 등 뒤의 세계는 의도와 무관하게 벌어지고 버려지고. 돌아서는 등은 스스로가 짊어지는(짊어져야 하는) 세계를 고스란히 내보일 텐데. 무수한 전복의 되풀이 속에서 묵묵히 걸어간다면 멀어진다면 등이라는 소실점은 결국 사라질 텐데 그럼에도 소리쳐 말하기를 그칠 수 없을 텐데. 우리의 전면이 말하기를 맡는다면 배면은 듣기를 맡는다. 우리의 전면이 읽기를 맡는다면 배면은 이해하기를 맡는다.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고(않고), 읽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 채(않으며) 더듬거리며 부대끼는 배역이라니. 시몬 베이유는 ‘읽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쪽에서도 ‘타인’을 읽고 있지만, 타인에게도 내가 ‘읽히고’ 있다. 읽기와 읽기가 서로 충돌한다. 어떤 상대에게, 자기가 그를 ‘읽는’ 대로 그도 그 상대 자신을 ‘읽으라’고 강요하기(노예로 만들기),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자기를 ‘읽는’ 대로 자기를 ‘읽어’ 달라고 강요하기(정복), 기계적인 작용, 대부분은 귀머거리들끼리의 대화.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철학강의/신을 기다리며』, 동서문화사


‘등’에 대한 시를 썼다. 복수의 ‘등’을 생각하며 썼다. 가까운 등과 먼 등에 대해, 보이는 등과 보이지 않는 등에 대해. 그런데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가,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가. 방향을 찾을 수 없을 때마다 바로 앉고 고쳐 앉으면서, 허리를 펴고 등을 펴면서, 숨을 깊고 느리게 쉬면서, 두 주먹의 힘은 빼면서. 눈은 천천히 감았다가 뜨면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서. 나의 두 손, 나의 두 발, 나의 목과 머리. 나의 가슴과 배. 나의 눈과 귀. 나의 입과 혀. 지금 이 향기는 무엇이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복잡하고 다양한 이 세계는 눈앞으로 등 뒤로 이어지면서 감각하는 나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갈라지는데 이것은 마치 마술 같고 매우 매혹 같고 영영 사라지는 것이 서운하면서 좋은 듯 좋지만은 않은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 말은 번번이 무력하고 표현은 무용해 진짜 세상은 등 뒤에 있을 것만 같고.


밥물을 맞추는 건 어려워

손등은 높아졌다가 낮아졌다가

바닥을 숨기느라 어지럽거든

손에도 등이 있다니

누울 수도 없는 등이라니

등에서 등은 아득히 먼데

(...)

버티느라 깊어지는 물의

투명한 등을 들여다보면

바닥까지는 얼마나 멀까

(...)

우리는 언제 끝날까,

질문을 삼키는 등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시집 『사람은 사랑의 기준』 중 「등에서 등」 부분, 여우난골


아침 전철을 타기 위해 사람들은 서두른다. 이 역은 시청 앞에 있고. 시청은 언덕 위에 있고. 길 건너에는 높은 계단이 있고, 계단 위에서 보면 마을은 발밑으로 펼쳐진다. 계단을 세고 내려가다가 세는 걸 잊어버릴 즈음 돌아보면 등 뒤로 산 위로 드높은 시청의 이마가 보이고. 낮은 동네에는 재개발 현수막들과 치킨집 간판과 간판집 간판이 보이고, 그 앞에 누운 간판의 뼈대 위로 새 옷이 입혀지고 있다. 365일 세일 마트는 나가고 칼국수집이 들어서는구나.


거리를 조망하는 젊은 남자의 등은 뒤로 활처럼 휘어지고. 그의 등 뒤로 요양원 건물 간판과 도넛집 간판과 커피집 간판과 할랄 푸드집 간판과 번역·공증 집 간판들이 이어지고 그 모든 것들을 보는 나의 등 뒤로는 달리는 자동차들이, 피고 지는 무궁화와 능소화가, 소란스럽게 다투는 까치와 까마귀들이, 가파른 언덕과 뭉실한 바람과 미지근한 허공이 있다고 중얼거리는 순간 검은 새가 등 뒤로 무섭게 달려든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내가 새처럼 보였을까. 나는 사람이라니까.(사람이라서 그러는 것일 수도)


허리에 주름을 잔뜩 잡은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산모가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낮은 굽 샌들은 금빛, 압박스타킹은 살구색, 성큼성큼 용감한 걸음걸이. 그녀의 몸은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뒤로, 그녀를 따라 나도 좌석에 앉는다. 몸 안에 다른 몸을 품는 일, 모든 숨이 겹쳐지는 느낌. 자도 자도 졸음이 쏟아지겠지, 기이한 입덧은 멈췄을까. 맞은편 여인은 검정 물방울무늬가 가득한 핑크빛 원피스, 커다란 손수건은 활짝 펴서 무릎 위에, 팥죽색 샌들에는 큐빅 꽃장식, 발톱에는 연보라 페디큐어, 카키색 매니큐어를 바른 왼손 손톱은 긴데 오른손 손톱은 짧고, 옥팔찌를 한 팔목에는 레터링 된 에코백 손잡이, 시간의 검은 꽃은 손등으로부터 팔까지 기어 올라가고. 이 아침의 장면을 나는 느린 감각으로 바라본다. 출근 도중의 이 시간은 나를 채우고, 깨어나게 한다.(깨어나게 한다는 꿈을 꾸게 하는 것일 수도)


스피노자는 ‘정동’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흐름으로만 관찰되는 것. 흐르면서 개인들의 몸을 관통하면서 서로 공명하게 하는 감각의 지속이라고 말한다. 그 정동으로 나는 젊은 임산부를 이해하고 늙은 여인을 이해하고. 사라진 시간과 펼쳐질 시간 속을 헤매 다닌다. 망각되고 소실될 일상의 장면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조각들로 현존을 증명한다. 삶은 잠시 풍성해지고 유의미해지고 흥미진진해진다. 아침 출근길, 내가 살아 있는 시간. 이 작은 산책을 위해 출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나는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느끼는가, 어떤 향기가 나는가, 감촉은, 바람은, 햇살은 나를 뒤흔드는데 그것을 감각할 때의 나는 어떤 열락, 어떤 환희, 어떤 주이상스의 상태.


3. 허(虛),라는 말


허(虛)는 모든 것들이 지양하지만 지향되는, 끌려가지만 끌고 가는, 확연하지만 부재하는 결국, 결론, 결말의 방식. 이 세계를 지탱하는 투명한 힘.


범람하는 강에서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배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물이었나. 흔들흔들 찰랑찰랑 손을 내밀면 젖을 것 같고 고개를 내밀다가 기우뚱, 중심을 잃으면 그대로 물속으로 던져질 것 같은데 다시 타오르는 불이다. 차가운 것도 같고 뜨거운 것도 같고 젖은 것도 같고 타는 것도 같아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문지른다. 물줄기 너머로 불줄기 너머로 사람들이 보이고 집이 보이고 들판이 보이고 숲이 보이다가 희미해진다. 뜨거운 것도 같고 타버린 것도 같은데 통증이 없다. 또 다른 나는 이미 무너진 궁의 마당에서 별을 보고 있다. 별을 향해 활을 당기고 있다. 명중이다. 별이 부서져 쏟아지면서 발등까지 옮겨 붙을 것 같다. 놀라 소리를 지르다가(지르려다가) 아, 이것은 가상이지. VR 중이지. 정신 차리자, 목소리를 줄이자, 자세를 바로 하고 정신을 차릴 때쯤 끝은 나고.


고글을 쓰고 장갑을 끼고 헤드셋을 쓰면 사라진 사람들이 나타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고백이랄까, 참회랄까 맺힌 말을 하는 자의 목은 메는데. 모두를 속이려는 건가. 가능한 감각들을 확장시킨다는 건가. 새로운 방식으로 무한에 가 닿는다는 건가. 사랑을 할 수도 있고 살인을 할 수도 있고, 함성도 탄식도 용서도 속죄도 가능하다.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날 수도 있고 순식간에 빠져나갈 수도 있다. 가상의 공간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도 있겠다. 가상의 공간에 있는 나는 가상인가. 활동 기제가 외부에서 촉발되니 분명 가상인가. 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아주 가상은 아닌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은 가득 채워졌다는 말과 얼마나 다른가. 텅 빈 것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닌가. 바라보는 이 세계가 사실 허구라 할 때 허구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가상은 무엇인가. 극과 극이라 경계에서 맞닿아 있는 걸까. 가장 허구라는 걸까. 손끝에 닿는 별똥별, 불가사리, 맹수의 갈기, 깎아지른 절벽으로의 낙하.


덕수궁 근처 ‘고종의 길’을 걷는다. 분주히 공사 중인 대지의 위쪽으로 이어진 길 사이 부분만 남은 대문 기둥을 보았다. 흰 대리석으로 만든 문패의 글자들은 정으로 잔뜩 두드려 울퉁불퉁한 요철이 되었다. 어떤 성명이었을까, 몇 글자였을까, 몇 번이고 다른 문패가 달린 것은 아닐까. 멸시와 조롱의 결말은 아닐까. 매국의 혹은 망국의 이름이었을까. 존재가 생겨나서 이름이 생겨나고 이름이 생겨나서 존재가 완성되었을 텐데. 그를 위한 만인의 바람(혹은 무시)을 담은 이름자들은 셀 수 없이 호명되었을 텐데. 그 바람이 기도처럼 이어졌을 텐데. 선명한 이름도 궁금하고 지워진 이름도 궁금해지는데.


부산에서도 이런 기분. 해운대 미포 골목 들어가다가 빈터를 만났다. 집이었던 자리를 둘러 무너진 담장과 뻥 뚫린 대문을 지고 선 기둥에는 돌로 만든 문패가 있었다. 검은 한자는 절반이 지워졌는데 ‘張甲成’이라는 존함이었다, 대문이 사라진 대문을 들어서니 고양이 두 마리가 등을 곧추세운 채 뒷걸음질을 치고. 석재들이 뒹구는 끄트머리 둥그런 땅에는 누군가 부지런히 일군 상추며 깻잎이 자라고 있었다. 장갑성 선생님은 이곳에 커다란 집을 짓고 일가를 이루셨겠다.(순서가 바뀌었을 수도 있고) 바다를 바라보는 집에서 아이들은 자라서 학교에 가고 어른이 되었겠지. 고기를 잡았을까, 어구를 손질했을까, 다른 생계의 방식을 찾기도 했을까, 자손들은 저마다의 일가를 이루어 떠나고 집을 거둘 그마저 세상을 떠난 걸 아닐까, 혹은 더 좋은 곳을 찾아 이사를 가셨을까. 남은 이 대지는 다음에 무엇이 될까. 텅 비었으나 가득한 이야기들이, 구구절절의 서사가 봄날의 해풍처럼 불어오는데.


구조는 헐렁해진다. 구부러지고 깨지고 녹슬고 부서지면서 희미해지는 운명. 아버지에게 갈 때마다 그것을 느낀다.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 아버지가 내가 우리 모두가 그것을 통과하고 있다. 크고 작은 환난들을 지나면서도 강건히 버텼으나 최선에도 한계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걸음걸음 바닥을 긁는 소리, 구부러지고 작아지는 그림자, 애써 웃는 표정, 괜찮다, 하는 음성. 그러나 살갗은 헐렁헐렁해지고 깃털마다 새하얗게 변한 채 오늘도 또 한 걸음.


난생처음 혼자 남은 사람들을 본다. 어떤 그는 서울의 온갖 산을 찾아다닌다. 지도를 펴고 여기 또 저기 붉은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김밥과 생수 한 병을 사 갖고 등정하는 날들.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그가 찍은 산수화가 환히 열려 있고. 산을 가기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약을 챙기고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는. 또 다른 그는 일찍 일어나서 우유에 콘프레이크를 말아서 마시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탄다. 운전면허는 사고 후 반납. 탄현에서 문산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 까무룩 잠이 들 때도 있지만 젠틀맨은 입성을 단정히 하고, 대체로 똑바로 앉아 있다가 똑바로 걸어서 빈 집으로 귀가.


난생처음 혼자 남은 사람들을 자꾸 본다. 찬란과 찬탄을 간직한 채 서늘하고 고요해지는 사람들을 본다. 슬픔도 분노도 아픔도 가라앉은 빈 바닥에 눕는 밤. 모래알 같은 것이 어디 낀 것도 같은데 불편한 곳이 눈인지 혈관인지 마음인지 알 수 없겠지. 심장마비가 올 때면 심장이 아닌 곳이 아프다는데, 배나 팔이나 어깨처럼 절대 심장만은 아닌 곳이 아프다는데, 자각하는 증상으로는 통증의 위치를 찾아낼 수 없다는데. 연관통이 되어 어디가 아픈 줄도 모르고 알 수 없다, 알 수가 없어 중얼거리며 애먼 곳을 쓰다듬는 밤이 저물어 갈 텐데.


내 책상에서 바로 보이는 아파트 옥상에서 한 여자가 뛰어내렸다. 직전에 큰소리로 다투는 남자와 여자의 음성, 그들을 말리는 여자아이 목소리, 잠시 음소거의 순간이 있었는데. 1층에서 들리던 소란이 옥상으로 이어졌는데. 다다다다, 달음박질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굉음을 따라 사람들이 몰려들고 사이렌 소리가 이어졌는데. 인파 속에서 구급차로 옮겨지는 모습. 이후의 그녀는 세상을 정말로 떠났고, 그 집은 내내 어두운 채 적적하다가 이사를 나갔다. 그날 저녁 우리는 밥은 먹었고 설거지는 끝냈고 좀 앉아서 쉬어야지, 하는 일상이었는데. 계절이 바뀌고 그녀가 떨어진 화단 옆으로 동백 지나 라일락 지나 장미와 배롱나무꽃들이 이어지는데. 백일 피는, 아니 이어서 피고 진다는, 아니 한여름 세 차례 이어 핀다는 배롱나무의 꽃은 원래 향기가 없는가. 코를 가까이 또 멀리 들이대도 마른 꽃의 냄새만 난다. 살았던 순간을 급속 냉동시킨 것처럼 힘없이 부서져 버리기도 하고. 산 것이 죽은 것 같으니 죽은 것이 산 것 같기도 하고.


레비나스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이가 죽는다는 것은 얼굴이 가면이 된다는 것이다. 표현은 사라진다. 내 것이 아닌 죽음의 경험은 어떤 이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다. 그 어떤 이는 곧바로 생물학적 과정 너머에 있는 나이며, 어떤 이유로서 나와 엮여 있는 자이다.”(『신, 죽음 그리고 시간』, 그린비) 내가 경험한 몇 번의 죽음들, 아니 타인의 죽음의 경험들. 움직이지 않는 표정과 기이한 체온은 흔들어도 뺨을 비벼도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죽음은 부재는 망각은 상실은 ‘허(虛)’는 무엇인지, 부재는 부재의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닌지.


당신이 죽어버렸으니 이제는 사랑해 눈물 대신 침을 뱉지 무심한 척 떨어지는 눈물 아니 침, 이건 어쩐지 세례와도 같아 재빨리 짓이기면서 사랑해, 무거운 양팔을 들어 식어가는 몸을 안으면서 언제 우리는 우리였을까 물을 때 과거는 미래로 돌아온다

(...)

뭉툭해진 칼날을 바꿔 끼우면서 슬픔 없이 나른한 눈물을 흘리면서 몸통이 심장으로 차오르면서 굳어가는 가슴을 붉은 팔로 껴안으면서 조금 더 큰 고통을 소원하면서 금세 사라질 이름을 부르면서 금을 하나 또 그으면서

-시집 『중독』 중 「허전(虛傳)하는 고백」 부분, 문학동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그의 책 『느낌의 발견』에서 “진화 과정에서의 의식이 살아남은 유력한 이유는 의식을 가진 유기체가 자신의 느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 살아남은 것은 유기체가 자신의 정서에 대해 아는 것이 유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의식이 생물학적 특징으로 계속 유지되면서 의식은 정서에만 적용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서를 행동으로 바꾸는 수많은 자극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결국 의식은 가능한 감각 사건 전체에 걸쳐 적용이 가능해졌다.”라고 말한다.


나는 느낀다. 순간순간, 아니 그 순간이 다가오기 직전과 직후에 이미. 그것은 나의 모든 감각 기관을 통과한다. 세상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그 속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이리저리 얽힌 채로 달아나다가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넘어진 줄도 모르고 달아나다가 다치기도 하고, 다친 줄도 모르고 달아나다가 망가지기도 한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어떤 식으로든 나아지거나 나아졌다고 속거나 믿거나 잊거나 익숙해져서 조금 느슨해지기도 할 텐데, 그런 중에도 무언가는 결코 잠들지 않고 깨어있을 텐데. 느낌은 지각과 충동과 행동 같은 식으로 이어진다. 바로 그런 것이 살아 있는 맛 같다. 생물로서의 삶을 사는 것 같다.


나의 궤도와 타인의 궤도가 교차되는 순간이 끝날 때마다 작은 매듭을 성실히 짓고 끄트머리를 단정히 자르며 걸음을 이어간다. 통증이 있을 수 있고 마취 주사가 필요할 수도 있다. 익숙한 칼날에 다친 손가락, 봉합한 자리는 무척 아프다가 점점 빠르게 아물어가고 새살은 연분홍빛, 부드럽다. 지문이 사라졌는지, 다시 생겨나는지 그것은 이전과 같을 것인지 궁금해진다.


단어들을 데려다가 시를 쓰지만 단어들이 나를 데려다가 시를 쓸 때도 있다. 일상 속의 결정적인 장면 혹은 순간들은 가만히 잠든 채 있다가, 풀씨처럼 바늘처럼 탕약처럼 내려앉고 떠다니고 퍼져가다가 적확한 단어를 만나기도 한다.(만나지 못할 때도 있다, 많다) 과정 속의 궁리에는 속이 타들어가지만 마침내 구체적 시어로 형상화될 때면 나만의 영생을 얻은 기분이다. 아픈 손가락은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흉터들은 특별한 무늬처럼 보인다. 예쁘기도 하지.


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았다가 거대해지기를 되풀이하는 천변만화의 우주 생명체 같다, 아니 우주 같다, 아니 우주 맞다. 시 속의 단어들은 그래서 저마다 그토록 빛이 나고.


*이 글은 <문학사상> 2023 10월호 "시인의 단어사전"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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