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나 <새를 심었습니다> 서평
색들이, 숨들이 온통으로 들썩이는 날들. 가만히 있어도 함께 피어나고 자라는 것 같습니다. 이 봄날, 어찌 지내는지요. 적적한 안부가 안녕이려니 짐작하고 있습니다. 제 안부를 이 시집과 함께 보냅니다. 읽다 보면 상춘의 소란들이 아득한 소음처럼 변해버려요. 그렇게 어딘지 모를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새와
시집을 보자 이 새들 생각이 났어요. 역사 지붕에 매달려있는 나무새들입니다. 아마도 갈매기, 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일제히 지하를 향해 날개를 펼치고 있더군요. ‘새’는 시집 전반에 걸쳐 유의미한 단서로 등장합니다. 「새를 심었습니다」의 ‘뿌리에 흙이 묻’은 새는 새일까요. 새 이전일까요. 진흙의 새 같은 것일까요. 새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잠재적 가능태일까요. 새는 일상을 통과하여 도착했습니다만 ‘상자와 고양이와 단추와 감정노동자’가 있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공통점을 가졌군요. 자립적 개체로 존재할 수 없다는 공통점도요. 어딘가 놓일 장소(상자), 안전한 거처(고양이), 자신만을 위한 위치(단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직업(감정노동자) 같은 식으로요. 그야말로 ‘乙’이라는 거죠. 을은 간단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간단히 대체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망각되고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속이 궁금할 리 없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통념이 있습니다. 그런 을에게도 내일은 있습니다. 내일은 ‘새의 날개가 펼쳐지는 개화기’가 될 거라고요. 하지만 ‘빨리 죽는 것들은 오래’ 산다고 말을 이어갑니다. ‘개화기–빨리 죽는 것’이라면 개화한다 해도 그 상태의 지속성은 답보할 수 없겠지요. 그래서 파과기로 이어지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새를 심은 사람이니까요. ‘빨리’ 죽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오래’ 산다고요. 지금은 원래 ‘유목의 계절’이라고요. 계절을 뛰어넘을 수는 없으니까요. 벗어날 수도 없으니까요. 계절은 지나가는 것이므로 새들은 언젠가 피어날 것, 새들의 방식으로, 을의 방식으로 피어날 것이라 희망하고 있습니다.
새를 받았지요 (...) 새가 아니라고 말해도 새입니다 (...) 잘 깨지는 것, 씨앗이 단단한 것, 비정규직 냄새가 나는 것, (...) 새는 나쁜 계절 쪽으로 한 뼘씩 자라고, 종이 인형처럼 잘 찢어집니다. (...) 새를 오래 들여다보면 새싹 같은 乙을 닮았습니다. (...) 일주일에 물을 두 번 주었지요. 새의 눈동자가 조금 썩었어요. 얼굴을 매일 떨어뜨립니다. 새의 그늘이 깊어집니다. 실직의 징조입니다.//새를 두드리면 상자와 고양이와 단추와 감정노동자가 있습니다. (...) 乙은 당신을 지우고 내가 사는 저녁의 영광입니다. 동맹과 배반의 테이블에서 태어납니다. 내일은 새의 날개가 펼쳐지는 개화기입니다.//빨리 죽는 것들은 오래 삽니다. 유목의 계절입니다.
-「새를 심었습니다」 부분 (배열은 자의로 옮김)
새는 천변만화 합니다. 「새라는 통증」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열쇠입니다. ‘기분’이 되기도 하고 ‘감정’이 되기도 하고 ‘마술’이 되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새라고 말했지만 날아가거나 높이 있어 알아차리기 힘든 무언가를 말하는 것도 같아요. 숨은 얼굴 같기도 하고 숨기는 얼굴 같기도 하고요. 바로 그것을 허용하고 수용할 때 우리는 배태 중인 통증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통증을 느낄 수 없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존재한다 해도 위태로울 뿐이지요. 어떤 통증은 알아주기만 해도 견딜 만한 것이 됩니다.
새는 진흙에서 뱀을 꺼내는 마술
아직 죽지 못한 것들의 눈빛을 만지는 것
잘 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새라는 통증」 부분
새의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부서진 새
그리하여 세상의 모서리가 흩어진다
(...)
미학적 거리란
커다란 개의 이빨 자국처럼
차고 깊은 상처
기침을 하면
화살이 꽂힌 흰 새가 튀어나온다
심장 근처까지 다녀온 게 틀림없다
-「새를 깨닫다 2」 부분
역시 새들이 등장하는 시들을 보세요. ‘기침을 하면 화살이 꽂힌 흰 새가 튀어나’옵니다. 그 순간 우리는 ‘관흥국 사람들’처럼 가슴에 구멍이 나 있다는 걸 알게 되지요. 그 흰 새는 ‘내가 깨뜨린 새의 얼굴’입니다. 모든 것이 내가 저지른 일이고, 모두들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래서 ‘대화란 늘 아픈 것’이고 ‘기억 속의 사람들이 모두’ 아픕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 더 깨닫게 됩니다. ‘부서진 새’가 되어 ‘세상의 모서리가 흩어’지게 하니까요. 모서리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모르고 지나기 쉽습니다. 모서리는 접히는 부분, 구부러지는 부분, 왜곡되는 부분입니다. 그 형체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지만 바로 그 까닭으로 외면되곤 합니다. 세상의 모서리가 흩어지는 순간 바로 그곳에 모서리가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존재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처럼요. 새는 외부로부터 촉발되는 존재론적 인식입니다. 결정적 순간마다 돌아가고 돌아오게 하는 리셋 버튼처럼 작동됩니다.
소년과
비가 오는데 시집을 읽는데 버스가 시끌시끌합니다. 중학교 앞이에요. 남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탑니다. 변성기의 중학생들은 상상 이상입니다. 목소리는 천둥치고 웃음소리는 더욱 천둥칩니다. 일부러 아무 질문이나 하고 아무 대답이나 합니다. 기사님이 조용히 해 달리고 소리치지만 그 소리조차 묻혀버렸습니다. 어느 노인이 시끄럽다고 소리치지만 그 소리도 묻혀버렸습니다. 무서운 것도 없고 창피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 척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충만한 객기와 선 넘는 자유로 버스가 휘청거립니다. 그러는 중에도 어떤 소년들은 홀로 적막하더군요. 그들 모두는 일견 약자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과잉과 결핍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승과 초월 속에 있는 것도 같습니다. ‘소년’은 새와 함께 이 시집의 유의미한 단서입니다.
오늘 밤은
다친 감정의 방향이다
그대가 얼굴이 긴 것은
그대 안의 짐승 때문이다
심장 속에 펄럭이는
혁명의 깃발
붉다
누가 검은 짐승을 풀어두고 갔나
그대를
일곱 번 묶겠다
몸 안의 칼을 뽑아
녹슨 짐승의 배를 가르면
아픈 떠돌이별이 뜬다
슬픔은 개인적이라
가끔 투명하다
-「소년들」 전문
소년들이었지요, 우리는 모두 소년들이었습니다. 밤은 잠의 시간이지만 잠들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포기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중력 탓에 길어지지만 이룰 수 없는 소망, 바람, 희망, 갈구, 혁명 그런 것들의 인력으로 더욱더 길어집니다. 그런 소년을 일곱 번 묶습니다. 일곱 번 묶는다면 염이군요. 소년의 종말, 소망의 종말인가요. 오래 전 끝나버린 소년, 그래서 검은 짐승은 녹슬어버렸군요. 그 배를 가르면 그래도 떠돌이별이 뜬다고요. 슬픔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슬픈 사람은 표가 나니까요. 소년들은 순순히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저마다 스스로의 소년을 죽인 것도 같아요. 그 사실을 잊어버린 채 살다가 어느 밤에 문득 깨어나지요. 녹슨 짐승은 자신에 대한 자각 아닐까요. 스스로의 배를 가르는 일은 제 눈을 멀게 하는 신화 속 존재 같습니다. 잠든 자아를 깨우는 행동이지요. 언제고 죽지 않는 소년이 그 속에 있습니다. 자라지 못한 채 여전히 떠돌이별 같은 소망을 품고 있지요. 저의 소년을 불러보는 밤입니다.
죽은 바다를 주웠다
우리들의 낙원에는 처음부터 뱀이 살았다
아비의 피에서 살과 뼈와 머리터럭을 꺼내었다
나는 찢겨진 밤의 아들
거짓처럼 태어난다
내 손은 죄의 빛깔
그대를 만지면 그대가 검어진다
색의 기원을 묻지 마라
(...)
사람이 울면 실밥이 만져진다 피가 식지 않는다
나는 피가 흐르는 유령
한 손으로 덮을 수 없는 감정
-「소년들의 세계사」 부분
취한 손으로 천 마리 새를 쓰다듬었다
새를 만지면 온몸이 가려웠다
(...)
내 이름을 한자로 쓰면 용서받는 감정이 된다
(...)
고백을 하면 내 안의 아버지가 조금씩 녹았다
추운 것을 죄라고 적었다
울고 있을 때 심장이 따뜻해진다
-「소년들의 세계사 2」 부분
이름을 부르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
혁명이 끝나고 무산자(無産者)들은 소년으로 되돌아간다
기이한 감정, 기이한 노래, 기이한 주술
도시의 모든 소년은 예언이다
(...)
소년을 그리고 난 후 당신은
어제의 인간이 아니다
12시가 되면 소년들이 태어난다
빛난다,
소년은
-「소년들의 세계사 3」 부분
소년들에게는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의 이름은 한 소년만을 위해 지어지는 기도문 같아요. 그 이름은 ‘한자로 쓰면 용서받는 감정이’ 되기도 하고(「소년들의 세계사 2」), ‘부르면 이상한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소년들의 세계사3」) 용서받는 감정은 이름이 지어지던 순간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 같고요. 이상한 냄새가 난다면 기도의 치외라는 의미 같아요. 기도 속에서조차 자리를 찾지 못했으니까요.
시인은 말합니다. ‘삶이란 가장 높이 나는 새가 제 몸속으로 추락하는 것’이라고요. ‘우리는 사라져서 무섭다’는 건 제 몸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그래서 모든 상실을 목도하고 실감한다는 뜻이겠지요. 제 몸속에 ‘천 마리 새를’ 품은 자가 ‘제 몸속으로 추락하는’ 일이라니 죽지 않고도 떨어지는 새라니 날개가 추락을 위해 소비되다니 그 세계는 전도된 공간이 아닐까요. 일상이 비일상이 되고 시작이 끝이 되고 앞이 뒤가 되고 가능이 불가능이 되고 그 모든 것을 예감하는 존재로서의 소년은, 전지하나 무력한 존재인 소년은 우리 곁에서 눈물 글썽이는 개체들을 호명하는 이름 같습니다.
「소년들의 세계사」에서 소년들이 만나게 될 ‘뱀’을 상상합니다. 곧 짓게 되거나 이미 지어버린 죄들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죄란 얼마나 다종다양한지 이유도 많고 배경도 많고 핑계도 많지만 호기심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잘 알지 못하는 것들에 미혹되니까요. 죄를 짓게 된 자들의 상심과 후회, 상실과 우울 같은 감정이 떠오르는군요. 무겁고 따갑고 불편하지요. 벗어버리고 싶습니다. ‘피가 흐르는’ 채로 ‘유령’인 듯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라니 무력해집니다. ‘나를 안고 울다 가는 이름’이 ‘나’랍니다. 소년들의 세계는 무연한 통증에 의해 운영됩니다. ‘새’가 외부로부터 촉발되는 존재론적 인식이라면 ‘소년’은 내부로 가 닿는 존재론적 인식으로 사물들 간의 관계성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새를 품은 소년을 품은 어른들은 고스란히 돌아갈 아득한 공동의 중심에 존재합니다.
오래 바라본다는 것
시인은 오래 바라봅니다. 이를테면 새, 소년, 진흙 같은 것들을요. 바라보는 행위는 그 대상을 존재하게 합니다. 오래 바라보며 알아차리며 대상을 주변과 구분해냅니다. 주변으로부터 오려냅니다.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중심만 남고 주변이 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심과 주변이 등가의 가치를 갖습니다. 효용이 아니라 가치 말입니다.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것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서로의 부재가 존재를, 존재가 부재를, 부재가 부재를, 존재가 존재를 증명합니다.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백자철채(白磁鐵彩) 인물명기(人物明器)”를 보았습니다. 어린이용 장난감인가 했어요. 작고 귀엽잖아요. 명기(明器)는 죽은 사람의 내세를 위해 무덤에 함께 묻던 기물을 말하지요. 그릇도 인형도 생활용품도 묻었는데요. 순장 풍습의 폐해를 없애고자 만들었습니다. 사진 속 명기는 17세기 조선의 것인데 가체를 올린 세 명의 여인들과 세 명의 남자들과 흰 가마가 세트입니다. 저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텅 빈 흰 가마를 중심으로 서있어요. 눈이며 눈썹이며 표정이 조금씩 다른데 웃음을 참는 듯 울음을 참는 듯 보였어요. 저 작은 가마에 죽은 자를 모시려고 기다리는 것일까요. 세상이 죽은 자와 산 자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산 자를 베어내면 죽은 자가 남을까요. 죽은 자를 치우면 산 자가 남게 될까요. 서로는 사라지지 않으면서 서로 침투하고 겹쳐진 채 영원을 버티는 게 아닐까요. 시인의 세상처럼요. 그러고 멈춰 있으니 어서 앞으로 가라고 뒤에 계신 분들이 웅성웅성하시더군요.
「분홍의 서사」을 보세요. 대상들은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서로를 받아들여요. 흰색과 빨강은 서로 흡수하여 분홍 속에 혼재합니다. 분홍은 흰색의 증거이자 빨강의 증거, 그렇게 존재는 비존재의 증거이고 비존재는 존재의 증거가 됩니다. 이전과 이후가 이어지면서 존재의 동심원이 확장됩니다. 이는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포괄적 관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내가 지옥이다
창문을 열면 검은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일찍 떠난 사람들은 읽을 수 없는 편지를 보내왔다
(...)
검은 손톱은 일종의 폐허였다
아이들이 썩은 이를 지붕 위에 던지면
썩은 이가 돋았다
기차가 들어서면 흑해의 소금 냄새가 났다
뒤를 돌아보면 갱도에 핀 꽃들이 썩고 있었다
(...)
기침을 하면 검은 사람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진폐(塵肺)」 부분
이와 반대로 이 시에서는 배타적인 관계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썩은 이를 던지면’ 새 이가 나와야 하는데 ‘썩은 이가 돋’으니 기대와 어긋납니다. ‘거울 속의 나-검은 얼굴-일찍 떠난 사람들-아버지-썩은 이를 던지는 아이들-죽은 여자-실뭉치 같은 여자-검은 사람’들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흑해 냄새’가 나는가요. 진폐의 증상들은 환경이 변하지 않는 한 더욱 심해지겠지요. 욕을 하고, 던지고, 기침을 해도 이 병은 달라붙어 있어요. ‘내가 볼 수 있는 슬픔만을 보리라’는 다짐이 ‘진폐’의 원인이고 결과입니다. ‘아버지가 내 이마를 만지면’ 여기서의 ‘아버지’를 신적 존재로 환치한다면 나는 치유되어야 합니다.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 꿈도 얼룩’지고 마네요. ‘검은 손톱’은 상흔입니다. 외부적 가격일 수도 있고 내부적 병증일 수도 있고요. 태생적 죽음의 징후일 것도 같습니다. 들여다보며 알게 된 것이 지옥이라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손톱은
죽어서 산다
끊임없이 나를 밀어낸다
손톱을 오래 들여다보면
나무뿌리가 뻗어 나오고
진흙으로 두 눈을 바른 아이가
더러운 귀를 씻고 있다
손톱을 깎으면
죽은 기차들이 나를 통과해 가고
늙은 쥐가 손톱을 먹고 있다
늘 바깥인
손톱의 밤은
얼마나 캄캄한가
사랑은 개연성 따위는 필요 없다
멀리 날아간 손톱은
가끔 얼굴이 되기도 한다
-「손톱의 서정」 전문
시인은 바라보고 있습니다. 산 것이 죽은 것 같기도 하고 죽은 것이 산 것인 양 굴기도 하는데요. 그 모든 부조리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침이 터지는 순간에도, 죽음의 냄새를 맡으면서도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손톱’을 ‘오래’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나무뿌리’도 나오고 ‘진흙으로 두 눈을 바른 아이가 더러운 귀를 씻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 ‘손톱을 깎으면’ ‘죽은 기차들이’ ‘늙은 쥐가 손톱을 먹’고 있어요. 잘린 손톱은 늙은 쥐의 몸이 되어 어디로 가게 될까요. 수많은 내가 되어 수많은 비존재들을 알아차리게 될까요. 의도를 비운 채로도 비존재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아니 바라본다는 행위에는 일말의 의도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 의도라는 것은 시인을 둘러싼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은 마음일 겁니다. 현존하고자 하는 바람이고요. 시인은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 바라보아야 압니다.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라보면 사물은 사물의 이후가 됩니다. 사물의 미래가 됩니다. 사물의 가능성이 됩니다.
눈을 감으면
한 사람의 영혼과도
마주치지 않으며
(...)
진흙은 사람을 쉽게 버리며
진흙은 찰지고 고요하고
아름답지 않으며
비를 맞으면
내 몸에서
무너진 풍경이
다시 무너지지 않으며
(...)
사막이 지나가지 않고
불타는 밤이 만져지지 않고
진흙이 진흙을 끌고 오지 않고
다 읽을 수 없는
진흙 얼굴은
-「진흙 연습」 부분
바라보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물들이 진흙이 되고 진흙에서 다시 무언가 태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상상해보세요. 생명은 진흙에서 탄생합니다. 삶 속에 우글우글 존재하는 죽음을 죽음 속에 우글우글 배태된 생명으로 견딥니다. 진흙은 물과 땅이 결합해서 만들어지지요. 물이 지나는 곳마다 생기고 강이나 바다에서도 생기고 땅 위에서도 생깁니다. 유기물이 풍부하여 다양한 물질들이 생성됩니다. ‘진흙 연습’은 누가 합니까. (아마도) 모든 것들이 합니다. 이 시에서의 부정 종언을 긍정 종언으로 바꾸어 읽으면 진흙 인간의 현재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눈을 감으면 어떤 영혼과 자꾸 마주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진흙의 심장에 금이 간 것 같은 상태까지 말이죠. 그래서 진흙 연습이 필요한 거죠. 진흙이 아름답다는 것을, 진흙이 강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시간이 해낸다는 것도요.
오후 내내 폭설이었다
집에서 앞 머리카락을 잘랐다
이마의 흉터가 선명했다
어릴 적 담장에 핀 동백을 따다
커다란 돌이 내 이마에 떨어졌다
(...)
종이 인형을 오리는 습관이 생겼다
빨리 죽는 것들에 대하여 오래 생각했다
(...)
이번 생은 내가 만든 산이라
혼자 넘어야 한다
무릎을 안으면 진흙이 묻어 있었다
-「동백 전언」 부분
폭설은 고립의 상태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립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는 무언가에 사로잡힙니다. 상처들을 더듬으면서요. ‘이마의 흉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담장에 핀 동백’을 따다 생긴 것이지요. 어떤 열망의 대상, 아름다움의 전형, 알면 안 되는(안 된다고 하는) 비의를 알고 싶은 마음이 상처를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가려도 사려지지 않습니다. 흉터는 시간을 건너서 전해오는 금기의 전언입니다. ‘동백’이라고 부르는 불가능한 열망 속에서 당신은 ‘종이 인형’을 오립니다. 그것은 존재의 대체제, 무해한 대상물입니다. 형상을 가진 것처럼 보이고, 보기에 좋지만 빠르게 사라질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열망하다가 아무도 모르게 지워지면 되니까요. ‘진흙이 묻어 있’는 ‘무릎’을 안고 어딜 가고 있나요. 동백은 피고 또 피는 것. 뿌리는 우리들의 몸속 깊이 내리고 있겠지요. 그래서 동백의 말을 들으려면 고요해져야 하나 봅니다.
미처 부르지 못한 노래가 쏟아졌다
피아노는 피아노라는 이름에서 달려나왔다
피아노는 피아노를 끊었다
도를 누르면 나무와 바람 소리가 났다
(...)
성대를 수술한 애완견의 침묵처럼
음악실은 추웠다
아이들은
망가진 피아노 뒤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입을 맞추곤 했다
피아노를 열면
썩은 알집에서
거미 새끼들이 까맣게 흩어졌다
실패한 건반은 다정하다
-「생각하는 사물들」 부분
부서진 피아노는 텅 비어 충만한 존재감을 되찾습니다. 거기서 ‘미처 부르지 못한 노래가 쏟아’집니다. 피아노는 피아노가 아니어도 피아노입니다. 존재는 이름을 뛰어넘는 것이니까요. 피아노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 나무는 바람과 햇살과 흙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것. 그러므로 피아노는 부서진 다음에야 비로소 부르고 싶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도를 누르면 나무와 바람 소리’가 나는 식으로요. 스스로를 뛰어넘는다는 것, 자신 이상의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이 죽음의 변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죽은 것처럼 보이는 피아노는 여전한 존재감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망가진 피아노 뒤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입을 맞추’니까요. 피아노 속에 ‘거미 새끼들이 까맣게 흩어’지고 있으니까요. 끝나버린 존재들이 끝나지 않았음을 목도합니다.
거대한 폐허와 치명적인 상실에도 불구하고 노래하고 키스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비극적인 희망이고 희망적인 비극입니다. 그러니 오래 바라봅시다. 동일성 이면의 동일성을, 이질성 배면의 이질성을 바라봅시다. 고개를 들면 시간의 흐름으로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변한 것은 시간일 뿐 존재는 아닙니다. 오래 바라보면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변화하게 됩니다.
바다라는 성소
새벽 비가
파도에 쓸려 온 물고기 뼈를
조금씩 부수고 있다
찬술 석 잔에 소년들은
지혜로운 노인으로 늙어간다
소년들아 빨리 자라지 않아도 좋다
감은 눈을 다시 감으면
너와 나를 겹치면
서로 병든 얼굴을 꺼내는
포란의 계절이었다
꿈에서 흰 뼛조각 같은
어린아이의 썩은 이빨을 보았다
헌 것은 가고 새것은 돌아오라
삼승할망 어른이 살오를 꽃을 들고
내 어깨를 세 번 내리쳤다
-「애월 24」 부분
시집을 읽고 있으면 애월에 있는 듯합니다. 애월은 시인의 바다입니다. 시인의 바다는 삼승할망의 바다입니다. 살오를 꽃의 바다입니다. 앞서의 시에서 던져진 ‘썩은 이빨’이 ‘흰 뼛조각’으로 변합니다. 생성이 소멸로 이어지고 소멸이 다시 생성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헌것은 가고 새것이 돌아’옵니다. ‘포란의 계절’은 새로 태어난 어린 존재들의 예감만이 아닙니다. ‘감은 눈을 다시 감으면 너와 나를 겹치면 서로 병든 얼굴을 꺼내’면 시작되니까요. 시작만 시작이 아니라 끝도 시작이니까요. 그것이 가능해지는 까닭은 바다로 돌아와 치유하고 재생되기 때문입니다. 이전으로 돌아가는 재림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는, 갱신되는 재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도에 쓸려 온 물고기 뼈를 조금씩 부수’면 모래가 되겠지요. 물고기 뼈 대신 무엇을 넣어도 모래가 되겠지요. 젖은 감정들을 완전히 증발시킬 수는 없지만 때로 젖고 때로 마르고 다시 젖는 과정 속에서 살이 오르고 피가 돌고 뼈가 단단해질 겁니다. 바다는 그런 곳이니까요. 저마다의 성소이니까요.
죽간을 쓰고 진흙으로 봉하는 밤이면
애월로 애월로 돌아오는 파도들
쓸모없는 노력들
붙잡을 수 없는 것들
(...)
물양귀비는 해마다 꽃을 피우고
새 피가 돈다
한밤에 천리를 가는 등대 불빛은 고요에 가깝다
검은 먹으로 둥글게 휘어지는
애월이라는 필체
저 파도 속을 달려가는
만 마리의 말들은 언제 다 썩을 것인가
무량한 달빛은 언제 사람으로 우뚝 일어서는가
절벽에서 창백한 손과 발바닥으로
일어서는 진흙 사람들
터진 눈으로 고요에서 얼마나 달아났느냐
-「애월 29」 부분
비밀의 문서, 중대한 약속은 죽간에 써서 진흙으로 봉합니다. 잊으면 안 되는 사실들이 적혀 있지요. 그런 약조를 하고는 ‘애월’로 돌아옵니다. ‘쓸모없는 노력’과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뒤로 한 채 밀려옵니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고 다시 밀려오면서 바다 위로 해가 뜨고 지고 다시 뜨면서 ‘물양귀비’는 ‘새 피’가 돕니다. 모든 것이 애월 바다의 힘입니다. 몇 번이고 다시 살리는 힘입니다. 그래서 ‘만 마리의 말’들은 절대 썩지 못합니다. ‘무량한 달빛’은 이미 무량한 사람으로 우뚝 섰습니다.
어제는 다리를 다친 노루가 돌 속으로 걸어 들어와 편백나무 아래서 상처를 핥았다 눈밭에 남은 짐승의 상처 쪽으로 이계(異系)의 저녁이 몰려왔다 노루가 끌고 온 저녁 잔별들이 귤꽃처럼 흔들린다
흰 얼굴로 돌 속에 앉아 돌 해금을 켠다 해금이 노루 소리로 운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그림자가 부풀었다 검은 감정으로 나아가는 애월 피도 없이 살이 오르는
-「애월 30」 부분
애월에서는 시원으로 돌아갑니다. 물의 바다는 돌의 바다로 이어집니다. 상처 입은 존재들이, 존재 잃은 존재들이 쉬어가는 장소, 몇 번이고 되살아나는(되살아날 수 있는, 되살아나게 되는) 성소가 됩니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그림자가 부’푸는 곳, ‘피도 없이 살이 오르는’ 아니 살을 올리는 애월입니다. ‘돌’에 갇힌 사는 사람도 그것이 돌인 줄도 모르는 사람도 살아있습니다. 생명의 애월이니까요. 신들의 애월이니까요.
위의 시는 시인의 이전 시집 『립스틱 발달사』의 「애월 혹은」입니다. 그 시로부터 무한히 깊고 넓어진 바다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랑은 비루해진다’고요. 사람과 바다는 등가였다가 시공간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 지명을 ‘처음 소리 내어 부른 사람’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더듬더듬 그리며 함께 젖고 함께 빛나는 순간이 열립니다. 물길이 글길로, 글길이 마음길로. 마음길이 숨길로 이어지겠지요. 그렇게 지극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애월(涯月)이니까요.
시인의 애월은 구체적 장소일 수도 있고 일기와 같은 도구일 수도 있고 마음이 닿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제 안의 심연과 대면하게 되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겠지만 정말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조금은 가벼워지고 단단해지고 무거워지고 부드러워집니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슬퍼지겠지만 그것을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슬픔을 위로하는 슬픔은 바다 같습니다. 위로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치유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바다는 그 자리에 무심히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주는 사람처럼 말이지요.
나의 애월은 어디일까요. 당신의 애월은 어디인가요. 부디 그곳이 있기를, 다시 찾아내시기를, 돌아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에서 마음껏 풀어주고 뛰어다니고 헤엄치고 날아오르셨으면 좋겠습니다. 복기하는 후회와 다짐과 슬픔 같은 것들은 이제 그만 놓아버리시고요. 괜찮다, 괜찮아 받아 안아주는 그곳에서 당신의 새 봄날이 편안해지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밤이면 불면은 사라지고 그리던 나비잠에 빠져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소년의 얼굴이 그립습니다.
* 이 글은 <예술가> 2023년 여름호, 서안나 시인의 <새를 심었습니다> 서평으로 게재되었습니다.
* 서안나, <새를 심었습니다> , 여우난골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