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숙 <저녁이 다른 슬픔으로 저문다>
우리가 몸을 갖는 것일까, 몸이 우리를 갖는 것일까. 표리와 포괄의 상태처럼 보이지만 시시각각 우위가 뒤바뀌는 것 같다. 내가 내 몸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내 몸이 나를 갖고 있기도 하니까. 몸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욕망과 방만과 초조와 우울과 나태와 미련 같은 것들. 전지(全知)의 존재라면 쉽게 승리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거든. 몸이 나를 버리려 해도 내가 몸을 버리지 않을 때 기적 같은 다행을 만날 수도 있다.
어떤 일은 사건처럼 일어나서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윤인숙 시인의 첫 시집은 그러한 결정적 경험이 추동한다. 다른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이 되어 바라보는 일상은 일상적이지가 않다. 평범이 일순 비범한 일이 되어버린다. 시인은 근간의 사족을 잘라내고 먼지를 털고 거미줄을 걷어내며 가장자리를 가늠할 수 없는 무한의 중심이 되어 가만한 음성을 내고 있다. 봄눈이 눈에 내리는 듯 차갑게 반짝이며 어룽거리는데 첫 느낌은 아픔이다.
1. 아픔은 죽음은 슬픔
시인에게 나타나는 죽음의 상징은 도처에서 나타나 모였다가 흩어진다. 플래시몹(flash mob)이라도 하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형(異形)의 상징들은 ‘죽음’을 유념하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이거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그런 의문은 중요치 않다. 혼몽 중에는 그런 판관의 기준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눈알’을 파먹는 검은뿔나비, 흘러내리는 눈과 입, 시들어 숨죽인 손과 발, 풀썩 내려앉은 방구들, ‘마취’에 드는 일이며 ‘손금’없이 흔들리는 손처럼. 죽음은 그것에 이르는 진행형의 상태가 있을 뿐 실체는 없고 ‘저녁’, ‘밤’, ‘그림자’, ‘그늘’, ‘울음’, ‘비명’ 같은 것들로 되풀이되는데 그만큼 지금 살아있다는 증빙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멈추는 법을 모를 때면 멈출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난다. 기울어진 집에 앉은 듯 제어할 수 없는 위급에 대해 가장 명료히 말할 수 있는 아니 말해야 하는 자는 본인이다. 발화야 위급을 통과한 후라야 가능하지만 질문은 위급 중에 더욱 떠오르는 법, 시인은 묻는다.
양수 없는 무덤 속을 어떻게 헤엄치니,
뼈 삭아 내리잖니
환한 대낮에 당신이 묻지
물음은 당신의 온몸을 던지는 일,
아무도 받아주지 않지
울음은 언제나 물음표로 시작해 뻐근하게 몸 일으키며 끝나지
돌고 돌아 당신에게로 오는 것
눈물은 마르면서 스며들어 당신을 저미는 것
짜고 맵고 더러운 당신을 녹이는 것,
아무도 모르게 멀리 도망가는 것
두고두고 답을 구하는 것
비로소 당신이 당신에게 돌아가는 중
-「고분」 전문
답이 없는 질문을 왜 하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질문을 대체 왜. 질문이야말로 무의미를 타격하는 유의미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질문하는 순간에만 우리는 깨어있기 때문이다. 참 오래도 자고 있지, 이렇게 층층이 나란히 누워 있으니 이미 ‘무덤’ 속 같기도 한데. 그곳에선 모든 것이 삭아 내리겠지. 사라지는 수순을 밟겠지. 무슨 말도 들리지 않겠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아야 하는 칠흑의 내부겠지. 묻고 다시 묻는 일은 울고 다시 우는 일, 흘리는 눈물이 ‘짜고 맵고 더러운 당신을 녹이’겠지. ‘어떻게 헤엄치’냐고 묻지만 ‘두고두고 답을 구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므로 처음으로 돌아가서 리셋, 다시 시작하게 되었으므로 무덤 속은 출렁이는 ‘양수’의 우주가 된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바로 그 자리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머리끄댕이 잡혀 들어간 창고바닥
닭장엔 버리지 말라고
뱀가죽을 쓴 사람이 될 거라고
그 말을 뒤집어 쓴 채 살아
방사선 몸을 지나가고
첫눈 오듯 손톱에 검은 줄무늬
금세 잊어버리는 천국도 마다 않고
-「손톱」 부분
어떤 ‘뱀’일까.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한 뱀일까. 원죄를 만드는 뱀일까. 뱀가죽을 죄와 벌의 형상화라 한다면 그런 역할을 맡더라도 기필코 살고 싶다는 뜻일까. 무엇을 그렇게 잘못해서 벌을 받는 걸까. 병은 벌일까. 그래서 발도 잃고 날개도 잃고 꿈틀꿈틀 기어 다니는 짐승의 심정이 되는 걸까. 아픈 마음의 절망이 뱀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몸속에 그늘 간직한 채 먼 화석’이 된다면 지금의 통증에 무감해질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말이 다 사라져 ‘말’이란 모두 ‘바다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녹아 사라지니 ‘손톱’은 몸에서 떨어져나간 것, 이물스러워지는 것. 그러한 바다의 물비늘이라면 어마한 손톱 무덤처럼 보일 텐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나를 찌르는 온통의 날카로움이라니.
여기는 네가 올 곳이 못돼
어여가 어여가
빗방울 뭉게뭉게 피어나는데
뭐라고 할 말도 없어
나도 데려가
나도 좀 데려가
수면을 미는 바람 따라
빗방울 자꾸 치근대는데
움직일 수 없네
발목 잡고 놓지 않네
초록으로 번지는 흔들리는 방
-「경칩」 부분
경칩(驚蟄)은 놀랄 경(警)에 숨을 칩(蟄)을 쓴다. 방심이 허심, 세상의 기운이 풀려나갈 때 더욱 경계해야 한다. 시인의 경칩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데 ‘걷다가 걷다가 저수지’에 이르는 날이다. 무엇에 놀라 어디에 숨으려는 건가. 저수지는 멀리서 보면 아름답게만 보이는데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있으면 휩쓸려 들어갈 것만 같다. 무섭다. 이미 이 세상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저수지와 다르지 않을 텐데. 시인은 심연 속에 숨으려 하는데.
‘깊은 물속’의 ‘초록 방’이라면 임박한 죽음이라는 걸까, 싱싱한 죽음이라는 걸까. 지상의 일을 마치고 가 닿을 미지를 의미하는 것까, 확신도 없이 ‘훌쩍 뛰어 내렸는데’, ‘어여가 어여가’ 소리쳐 말리는 이가 있다. 아무리 ‘데려가 나도 좀 데려가’ 소리쳐도 ‘발목 잡고 놓지 않’는 존재는 무엇인가. 필시 시인을 애지중지 하는 자, 가깝거나 먼 곳에서 변함없이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이겠지. 어딘가에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 나를 지지해주는 존재가 있을 때 흔들리던 지반은 고요해진다. 잔뜩 힘을 준 손아귀를 풀고 불필요하게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줄 수 있다. 조심스럽게 편안해진다. 애면글면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한다는 것, 내가 나를 다시.
2. 물음은 웃음은 숨
아픔과 죽음과 슬픔 속의 시인은 미약하나마 행동하기 시작한다. 병도 치료도 동사형, 현재진행형이 되겠다. 건강을 위하는 현재의 행동들은 미래의 경로를 바꾸는 일. 시인은 묻고 웃고 춤추고 인사하고 물구나무를 서고 산책하고 달리고 숨을 고른다. 몸과 마음은 단단히 이어진 것이라서 몸만 치료할 수도 없고 마음만 치료할 수도 없다. 마음의 병은 몸의 병을 불러오고, 몸의 병은 마음을 병들게 할 텐데 무엇 하나를 들어 어떻게 전체를 낫게 하겠나. 시인은 무심히 대했던 몸과 마음과 연대하여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한다, 아니 치유를 허락하기 시작한다.
검은 뿔나비 쿡
눈알을 파먹고
검은 뿔나비 비틀
귓속에 들어가 운다
조그맣게
더 조그맣게
거긴 누구 집이니
누가 우니
울면서 속삭이니
왜 들리지 않니
손가락 목구멍에 넣었니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손을 떨며 가슴을 문지른다
그게 무슨 소용이니
가슴에 뿔
안개같이 웃는다
물무늬처럼 웃는다
심장의 모래 폭풍 속에서
길을 찾는다
길은 자꾸 번진다
첫번째얼굴뒤에얼룩말얼굴뒤에침대밑에숨은얼굴뒤에꼬리없는고래얼굴뒤에하마같은다람쥐얼굴뒤에피묻는입술스물세번째얼굴뒤에,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23번째 아이덴티티」전문
시인은 벌레가 파먹어 텅 빈 안구를 떠올린다. 그것은 사체의 이미지. 무엇이 우리의 본연일까. 눈(눈구멍)과 혀의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23번째 아이덴티티」-‘검은 뿔나비 쿡 눈알을 파먹고’, 「눈 속으로 혀를 쑥 집어넣고」-‘누가 눈 속으로 혀를 쑥 집어넣었어’, 「3월」-‘눈알을 이쑤시개로 쑤욱 밀어 넣어요’ 하는 식으로. 혀를 집어넣을 수 있는 눈이라면 해골일 터. 시인은 죽음을 관통하는 자고, 관통하는 스스로를 관음하는 자다.
시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거부하고 밀어낸다 해도 ‘나’는 자꾸 생겨난다는 것을. 내가 다시 생겨나면 죽음도 불행도 슬픔도 다시 생겨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안개’처럼 ‘물무늬’처럼 웃을 뿐이다. 하지만 웃음은 안개처럼 물무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그래도 또 웃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떤 세상은 끝나고 어떤 세상은 시작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순간의 감정, 그러니 또 웃는다. 그 사이 ’모래 폭풍‘은 되풀이되고 나 자신 또한 23번째 아이덴티티에서 24, 25 그다음 몇 번째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
감각할 수 없는 삶이 무의미라면 죽음과 다르지 않을 텐데. 무의미가 죽음을 환기한다면 의미야말로 삶을 환기하는 것. 무감각과 무의미를 깨뜨리고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삶 하나뿐인데 그것을 빼앗는다면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 살다 보면 그런 가혹을 겪곤 한다. 음성과 양성의 되풀이, 오진과 확진의 되풀이. 한숨을 쉬고, 안도의 한숨도 쉬면서 감각이 살아나고 의미가 살아난다. 일부러 그런 지경에 이를 필요는 없지만 이미 그러한 지경이라면 맵차게 달려야한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달렸지
숨이 찰 때까지
숨이 차서 속이 메슥거릴 때까지
달리기는 밤에 추는 춤 같은 거였어
내 손가락이, 내 눈동자가, 내 발목이,
허락도 없이 마구 내달릴까봐
제 맘대로 미쳐서 입에 거품물까봐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달렸어
거품도 꽃처럼 피어날까봐
그런데 그 꽃모가지 비틀어
누구에게 줄까
-「달리기」 전문
달리기는 정직하게 이어지는 숨의 일. 한 숨이 다음 숨과 이어지고 한 걸음이 다음 걸음과 이어진다는 경이.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고서야 그것이 그것이었음을 재감하곤 하는데. 숨을 쉴 수 있다면 걸을 수 있다면 걷고 뛰는 자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런 행위를 꿈꿀 수 있다면 어디선가 어느 샌가 꽃은 피어난다고 시인은 말한다. 입에 문 ’거품‘의 꽃이라고 해도 피어날 거라고. 그러니 ‘꽃모가지를 비틀어 누구에게 줄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달’리면 그만. 달리고 있다면 가장 살아있는 것.
구름 보려고 연꽃이 올라왔다
제 살길 찾아 떠나는 눈빛같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눈빛같이
연꽃대궁 목이 자꾸 길어진다
녹아내린 목소리는 진흙 속에 있을까
장마가 숨고르는 사이
연꽃이 피고 빨래가 마르고
얼음을 핥으며
구름 속 비를 끌어당기고 싶었다
-「숨 고르기」 부분
숨 고르기라면 가쁜 숨을 가라앉히고 순조롭게 가다듬는 일, 또한 숨을 고르는(select) 일이라고도 읽을 수 있다. 사느라 바빠서 구름 같은 건 볼 틈도 없었겠지. 구름을 보라는 ‘목소리만 무더위에 녹아내’리는 날이라니. 그러나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존재가 있었으니 이를테면 ‘연꽃’ 같은 것. 얼마나 오래도록 구름을 보았냐면 ‘목이 자꾸 길어’질 정도로. ‘녹아내린 목소리는 진흙 속에 있을까’, 시인은 묻고 있는데 맞다, 있다. 아무도 듣는 것 같지 않은 말은 하나마나 한 말 같지만, ‘녹아내’리고 사라져버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 순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라보는 자의 존재 때문, 대상과 관찰자의 유기적인 상관성이 만들어내는 세상이라니. ‘구름’에 대해 말하는 사이 ‘장마’는 ‘숨고르기’를 하고 ‘연꽃’은 피고 ‘빨래’는 마르고 있다. 적합한 숨을 고르며 순리를 찾는 우리들의 우주 마루에서 잘 마른 빨래를 걷어와야겠다.
3. 봄은 피어남은 삶
시인의 봄이 가고 봄이 온다. 모두 다른 봄이다. 「그 숲에서 한때」에서는 ‘한창인 꽃들’의 시간이다. ‘숲이 간직한 나의 봄이 다시 반짝반짝 빛’나고 있으니까. 시인은 묻는다. ‘내 보물과 당신 보물이 잘 묻혀있는지’. 그렇다면 지난 봄날에 보물을 묻어 놓았다는 이야기. 「3월 첫눈」은 눈이 내린 봄이다. ‘야반도주한 빈집’이라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 같은 일이겠지. 「첫,」의 봄은 끝나지 않는 계절이다. ‘먼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봄눈이 내’리니까. 그런 순간이면 ‘눈이 녹고 초록 잎이 돋아’나고 ‘난생 처음’의 봄이 오니까.
저수지 둑방길을 걷는다
수면으로 올라온 목이 긴 연잎 금방 숨넘어갈 것 같다
물이 차오르는 속도로 자랄 수 있을까
지난해 꽃도 못 피우고 이파리만 겨우 둥둥 떴었다
꽃을 보려고 저수지에 온 건 아니지만
잎 보면 꽃 생각
꽃 보면 열매생각 그러다
문득 돌아보면
꽃이 왔다간 듯
열매 맺어
저수지 둑방길은
나보다 태연하다
-「산책」 전문
둑방길을 산책하며 수면으로 올라온 연잎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회복기 환자들처럼 보이겠지. 힘겨웠지만 통과하고 있다고 강퍅한 팔다리로 힘을 내는 사람들. 깊고 맑아진 두 눈은 만물을 빛처럼 감각하겠지. 걸음걸음이 기특하겠지. 그런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꽃을 보려고 저수지에 온 건 아니지만’ 알게 된다. ‘문득 돌아보면 꽃이 왔다간 듯 열매 맺’고 있다는 것을. 꽃도 못 보고 열매도 못 보고 지나는 시간을 견딜 수만 있다면 선물처럼 발견하게 되는 ‘열매’가 있다. 우리는 생에 곧잘 당하지만 그 점은 어쩔 수 없다. 우리의 생을 뛰어넘는 일 따위는 없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쓴다. 쓰는 사람은 살아남는다. 살아남기 위해 쓰는 것은 아니지만.
나무 밑에 쪼그려 앉아
비 오는 걸 본다
피아노 두드리던 새의 부리
옆구리에 얼굴 비비던
몸 없는 것들의 장례
우리가 우리였던 적이 있었나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몰랐을
목덜미 솜털과 푸른 사마귀 점
비 오는 걸 보는 건
살아서 좋은 일 중 하나
빗물이 몸속으로 흘러들고
잎을 달고 고운 옷을 짓고
우리 이제 같은 날개를 달겠다
-「비 오는데, 가만히」 전문
이 시 속에는 ‘나무 밑에서 쪼그려 앉아 비 오는 걸 보’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우리였던 적이’ 없었던 것도 같지만 살아 있고, 비가 오고, 나란히 비 구경을 하다가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잘 보이지 않는 것, 작고 사소하고 아름다운 것, 이를테면 ‘목덜미 솜털과 푸른 사마귀 점’ 같은 것들. 비를 피해 뛰어갔다면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갑작스러운 환난이라 피하기에 열중했다면 알 수 없는 일들이다. 멈추어 비를 보고 더러 비를 맞으며 우리는 보게 되고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마침내 조금 더 자란다.
사람 구경하러 꽃이 왔다
며칠 다니러 와놓곤
일생이 참 환하다
벌들은 깨 볶듯 토닥토닥 튄다
날개만큼 투명한 꽃잎을 딛고
꽃이 왔다
꽃송이 한꺼번에 피어도
저희들 시간은
서로 밀고 당겨
몇 백 년 차이
흰 무더니 뭉클 뭉클
꾸역꾸역 밀려드는 헛배 같은
상상만으로 죽고 살기도 한다는데
깍지 낀 손은 오래 걸어가려 하고
멀리 있는 눈동자는 돌아오려 하지 않고
흰 곰처럼 눈처럼 불꽃처럼
사라질지도 몰라
환한 길, 다 거기에 없어
백만 년 다니러 와놓곤
순간처럼 반짝인다
지면서도 젊다
-「꽃이 왔다」 전문
무궁무진 변화무쌍한 전환의 순간이다. 꽃을 구경하러 사람이 오는 게 아니라 ‘사람 구경하러 꽃이 오’는 것은 관점의 전환이다. ‘며칠 다니러 와놓곤 일생이 참 환하’기도 하고 ‘백만 년 다니러 와놓곤 순간처럼 반짝’이는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꽃송이 한꺼번에 피어도 저희들 시간은 서로 밀고 당겨 몇 백 년 차이’ 나는 일은 감각의 전환이다. 몸과 마음의 파란곡절을 지나며 시인의 것이 된 선물들이다. 시인은 숨지도 나서지도 않으며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전(全) 존재가 되어서는 그다음의 말을 시작하고 우리는 함께 앉아서 귀를 기울이는데.
*
모든 일이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시간이 우리의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우리가 시간의 것인가 보다. 존재는 고통 없이 태어날 수 없다. 고통 없이 살 수 없다. 고통 없이는 죽을 수도 없을 것 같다. 세간의 몹쓸 병은, 병처럼 느껴지는 까마득한 일들은 살금살금 침습하여 우리가 가진 패를 흐트러뜨린다. 숨겨진 진짜 패를 알아차리고 판을 뒤집을 수도 있는 기회를 준다. 덕분에 우리는 멈추고 바라보고 알아보고 생각해 보고 엄두를 낼 것인가 고심초사하기도 한다. 아끼던 말과 참던 말을, 숨겨온 말과 밀어둔 말을 꺼낼 수 있는 용맹을 준다. 시인의 병은 시인에게 환한 패를 내준 것 같다. 위로를 해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받으면서 느끼는 동질감은 행복하면서도 쓸쓸한 일. 살아남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구석구석 작은 것들을 느리게 바라보면서 순정을 향하는 대답들이 이 시집 속에 있다.
* 윤인숙, <저녁이 다른 슬픔으로 저문다>, 서쪽나무 2022
* 이 글은 윤인숙 시인의 시집 <저녁이 다른 슬픔으로 저문다>의 해설입니다.